오늘도 안녕! 달래씨
달래씨와의 첫 만남은 1963년 음력 8월 12일 해거름에 이뤄졌다. 그러나 달래씨와의 구체적인 기억은 6살 이후부터 시작된 터라 저 날은 달래씨의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해 추정됐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남해안의 섬에서는 대부분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태어난 이듬해 동네 이장이 단체로 했기에 국가 공식 기록은 ‘640606’이다. 하여간 달래씨의 저 기억이 정확한지, 해거름은 도대체 몇 시인지 아리송해 평생 사주팔자를 못 본다. ‘교회 종 칠 때, 토끼 밥 줄 때’ 엄마를 처음 만난 동네 또래 아이들 역시 그렇다.
아직 달래씨 탯줄에 의지해 숨을 쉬던 때 군청 소재지에 산부인과 병원이 있었다. 이미 6명의 자식을 낳아 그중 한 명을 어려서 저 세상에 보낸 달래씨는 더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한 날 굳게 마음을 먹고 멀리 그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그날 의사가 출타 중이었다. ‘에고, 이놈을 낳아서 키우라는 소린갑다’며 집으로 돌아오는 통에 구사일생으로 달래씨와 만날 수 있었다.
달래씨는 1929년에 태어났다. 물론 이 역시 국가 공식 기록일 뿐, 텔레비전에 고 김대중 대통령이 나오기라도 하면 ‘저이와 내가 동갑’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출생연도와 5년의 차이가 있으니 달래씨의 실제 연세는 아마도 아흔 살 언저리로 보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에야 확인할 길도 없지만 굳이 그리할 이유도 없겠다.
올해 (아마도) 아흔 살의 달래씨는 완전문맹이다. 1930년대의 일제강점기 남해안 섬에서 태어났던 많은 딸들이 그러했다. 열여덟 살에 옆 마을의 두 살 위 총각과 결혼해 서른여섯 즈음에 생존한 4남 2녀의 막둥이 아들을 낳으셨다. 그토록 가난했던 섬마을에서 쉴 틈 없는 농사일·갯일 사이 모두 8명 가족의 삼시세끼 밥상을 꼬박꼬박 차리고, 빨래와 청소 등 가사 일체를 돌보며, 젖먹이 어린 자식까지 양육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실로 상상할 수 없는 대역사다. 어쨌든 달래씨는 그 일을 모두 해냈다. 그것도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라는 까막눈으로.
어느 날, 중학교 2학년이던 막내아들은 친구들과 거리를 걷다가 어판장에서 리어카에 조개를 가득 싣고 시장으로 향하던 달래씨를 먼발치에서 봤다. 작은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힘에 부친 달래씨가 리어카를 제어하려고 핸들을 꼭 잡은 채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리어카 받침대를 브레이크 삼아 땅바닥에 긁히며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다. 막내아들은 얼른 뛰어가 돕는 대신 그런 달래씨가 엄마라는 것이 창피해 애써 외면한 채 제 길을 가고 말았다. 또 어느 날 저녁엔 무슨 돈 8천원을 안 준다고 단칸방 부엌의 펄펄 끓는 연탄불에 찬물 한 바가지를 퍼부어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듦으로써 달래씨가 방파제에 나가 대성통곡하게 하기도 했다.
그토록 철없던 아들의 학교와 학년이 높아질수록 달래씨의 머리 위 함지박도 비례해 무거워졌고, 달래씨의 목은 반비례로 짧아졌다. 도시로 유학 간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붕어빵 몇 개를 사먹을까 말까 고민고민하다 집에 들어와 찬물 한 바가지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시장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달래씨는 신체 작은 아들이 도시에서 날마다 얻어맞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 이불을 둘러쓰고 울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막내아들은 무사히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취직하고 결혼도 했다. 1남 1녀의 가정도 이루었다. 대도시에 집 칸도 마련했고 신문에 대문짝만 한 칼럼도 쓴다. 그 사이에 제 새끼 키운다고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아흔의 달래씨가 사는 집은 그 항구 인근의 요양원으로 바뀌었다. 언제든 맨발로 반기던 막둥이 아들이 가물에 콩 나듯 찾아가 ‘엄마!’ 하고 불러도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벌써 나이 오십을 넘겼음에도 막둥이에게는 어머니보다 엄마가 더 익숙하다. 달래씨는 그 막둥이 아들인 나의 엄마다.
나는 왜소하다. ‘노가다’라도 할 수 있을까 싶게 왜소하다. 하여 달래씨가 죽을 힘으로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때의 내 인생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 달래씨가 이제 시나브로 멀어져 간다. 따라 가려야 갈 수 없는 곳으로 멀어져 간다. ‘막둥아! 새끼들 잘 키우고 각시랑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역력한 오매불망을 내 가슴에 수북이 내려놓고 휘적휘적 멀어져 간다. 바닥까지 타 들어간 촛불처럼 위태위태 출렁이며 아득해져 간다.
나는 그런 달래씨, 나의 엄마에게 ‘미안해요. 사랑해요. 고마웠어요’란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이제껏 겪은 인생으로는 ‘아부지’란 단어가 ‘엄마’보다 결코 가볍지는 않으나 내겐 그 아부지로 인해 엄마가 더욱 숭고하디 숭고하시다. 오늘도 안녕! 달래씨.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