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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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 작가 북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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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그래그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위한 변명

결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어서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것이다. 조선 성종을 뒤이은 연산군의 즉위는 그 자체가 비극의 씨앗이었다. 7세 때 세자로 책봉돼 제왕수업을 받았던 그였지만 가슴 한편에 응어리졌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한이 그를 전례 없는 폭군으로 둔갑시켰고, 끝내 강화도 교동에 유폐돼 쓸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선조 임금은 명종이 후사 없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얼떨결’에 왕이 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열여섯이었는데 세자책봉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에 제왕수업도 받지 못했다. 군주로서 만백성들을 위해 고루 갖춰야 할 인성과 덕목이 많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술수에 뛰어나 권력장악에는 능했으나 정치와 외교에는 무능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왜군의 북진에 놀란 선조는 칠흑의 어둠과 폭우를 뚫고 평양으로 야반도주했다. 오직 자기 한 목숨만 귀할 뿐 만백성의 안위와 국가보위는 안중에 없었다. 평양도 불안했던 선조는 의주로 피신한 후 아예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 변방의 제후로 대접 받는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을 탐했다.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약 대가(大駕)가 이 땅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조선은 이미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평양에 머물며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세우소서”라고 읍소하며 선조를 막아 선 이는 류성룡이었다.

선조가 진심으로 두려운 것은 왜군보다 조선의 민심이었다. 좌의정 윤두수에게 ‘적병의 절반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맞느냐?’고 물었을 만큼 선조가 한양을 뜨자 분노한 백성들이 궁궐과 관공서를 불태웠다. 평양에서는 종묘사직의 위패가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왕과 왕자들의 행로는 백성들에 의해 왜군에게 ‘보고’됐다. 피란 중에도 행패를 일삼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반란군에게 붙잡혀 왜군에게 포로로 넘겨졌다.

왕족뿐만 아니었다.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은 강 건너편에 왜군이 나타나자 싸워볼 생각도 없이 중무기들을 한강에 수장시킨 후 변장하고 달아났다. 도성방어 책임자 우의정 이양원도 마찬가지였다. 왜군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성을 접수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조를 쪼개 주고, 귀찮은 류성룡도 총사령관으로 떼어내 ‘나라는 너희들이 지켜라’며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널 심산으로 파주로 내뺐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그 와중에 목숨 걸고 싸웠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의병장 김덕령·곽재우 같은 이들을 ‘모반죄’로 고문했고, 김덕령은 그예 목숨마저 잃었다.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백성들이 고생했던 역사는 차고 넘친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 짓던 총각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왕으로 ‘차출’됐다.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으나 뭐가 뭔지 모르는 철종은 주색잡기로 일관하다 단명했다. 그때부터 일제식민지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지어냈던 십상시 환관 조고와 어리석은 황제 진이세가 부른 진나라 망국의 역사는 더 말하면 지루하다.

연산군, 선조, 철종, 진이세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은 공히 일부분이 겹친다. 아버지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정변으로 ‘절대정권’을 차지했을 때 그녀 나이 겨우 9살이었다. 대통령을 임금에 빗대는 ‘각하’로 불러야 했던 엄중한 시기였기에 그녀 또한 ‘근혜’가 아닌 ‘영애(令愛)’로 불렸지만 실체는 ‘공주님’이었다.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를 빼면 누가 감히 그녀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세웠겠는가. 그런 천상의 세월이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와 청소년기, 청년기까지 20년이었다. 마지막엔 어머니의 피살로 ‘영부인’ 역할까지 맡았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 이토록 드라마틱한 이력을 가진 이는 그녀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그녀는 보통의 국민은 상상 불허의 세계에서 살아야 했다. 대개 동물들의 신비롭고 치밀한 행위는 애초 두뇌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따르는 본능적 결과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난 이후 본능에 더한 사회적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성과 사회성을 획득하는 것에서 동물들과 다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대신 주변의 ‘꾼’들에 의해 절대권력의 적폐들이 주로 그녀의 두뇌에 프로그래밍됐다.

세월이 지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됐지만 골수에 박힌 프로그램은 깨지지 않았다. 측근들의 일부는 그녀의 그런 실체를 알았지만 어리바리한 진이세를 황제로 옹립했던 환관 조고처럼 그래서 더욱 그녀를 대통령으로 밀어올렸다. 당연히 그녀는 프로그램에 따라 대통령 직을 수행했다. ‘비선실세’ 역시 아버지 때 익숙하게 겪었던 바, 위법·탈법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국정운영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삼척동자도 알 것 같은 유종의 미를 거둘 기회를 모두 놓쳤다.

알고도 저지른 나쁜 짓은 나쁘지만 모르고 저지른 나쁜 짓은 좀 다르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 또한 재판보다 계몽 대상이다. 재판 받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면 체면, 염치, 수치, 양심 등 보통의 사람이라면 있을 그런 것들이 안 보인다. 자신이 왜 감옥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존심이 무척 상한다. 자괴감이 든다. 로봇을 재판정에 세우고서 서로들 희희낙락하는 것 같아 역겹다. 그러니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자. 그것이 애써 웃고 살려는 국민들을 돕는 길이다. 정녕 천벌 받을 자들은 십상시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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