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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 왕소군(王昭君)은 불행한 여인이었나?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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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7-2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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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청총(靑塚)이라 부르기도 하는 王昭君의 묘는 과거 흉노의 선우정이 있었던 내몽골의 후흐호트 시내에서 남쪽으로 9㎞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흑하(大黑河)라 불리는 하천의 남쪽에 있는 곳이다.
 

[사진 = 내몽골 성도 후흐호트]

필자가 직접 찾아 가 본 왕소군의 묘소는 사방 100 미터 이상의 넓은 대지위에 아담하고 청결하게 꾸며져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50미터쯤 되는 동산 위쪽에 소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 평지에는 정원과 작은 연못 그리고 그녀의 비석과 동상 그리고 그녀와 선우의 모습을 새긴 대형 대리석 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동상과 벽면의 조각으로 현대의 사람들이 환생시켜 놓은 왕소군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중국의 대표적인 미녀를 후세의 사람들이 최대한 아름답게 그려 넣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화친의 상징물로 꾸민 가묘(假墓)
왕소군의 묘소는 몽골자치구의 중점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성스럽게 꾸며 놓은 이 묘는 왕소군의 진짜 묘는 아니다.

에진호르에 있는 칭기스칸의 가묘처럼 이 왕소군의 묘역도 가묘로 꾸며 놓은 것이다.
원래 흉노인들은 왕소군을 존경해 포두(包頭)의 황하 강변에 큰 무덤을 만들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원래의 묘가 유실돼 버리자 이번에는 중국인들이 후흐호트에 가묘를 만들어 놓고 한족과 몽골족 사이의 화친을 이룬 상징물로 내세우고 있다.
이곳에 기록된 그녀에 대한 소개는 한서 (漢書) 원제기(元帝記)와 흉노전에 기록된 내용을 참조로 현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적혀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牆)이고 후인이 그녀를 소군 또는 명비(明妃)로 불렀다. 호북성 여산현(輿山懸) 출신으로 기원전 33년, 흉노와 한족의 평화를 위해 자진해서 흉노에게 시집가 양국의 우호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호북성 여산현은 바로 지금 삼협(三峽)댐이 들어선 장강 지역에 있다.
삼협은 장강 주류에 있는 구당협과 무협 그리고 서릉협 등 세 개의 협곡을 말하지만 왕소군 같은 미인과 굴원과 같은 의인 그리고 원숭이의 후손인 야인이 났다고 해서 삼협이라고 부른다는 이설(異說)도 있다.
왕소군은 바로 그 남쪽 지방에 태어나서 북방에서 삶을 마친 여인이었다.

▶ 전투와 화친이 반복된 흉노와 한
묵특과 유방간의 백등산 전투이후 흉노는 한나라에 대한 우위에 입장에 서서 70년 동안 흉노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 동안 한나라는 흉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숱한 전투를 벌였으나 대부분 한나라가 패하고 흉노가 승리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전투와 화친이 되풀이되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이후 40여 차례에 걸쳐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진일퇴하는 양상이 빚어졌다.

결국은 한나라가 우위에 서고 흉노가 열세로 밀리는 형국이 됐다.
그러나 양쪽의 충돌은 서로에게 손실이 커지면서 서로가 필요성에 따라 화친 관계를 이어가게 됐다.

그래서 한 무제의 시대가 끝난 이후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변경지역은 "성은 늦게 문을 닫고 소와 말들이 들판에 퍼져 있으며 개가 놀라 짖는 소리도 없고 병사도 없는" 평화의 상황이 계속됐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한의 원제 때 소군이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면서 더욱 긴밀해졌다.

▶ 야사로 널리 알려진 왕소군의 얘기
왕소군과 관련해서는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를 통해 더 잘 알려져 있다.
한서 원제기에는 "선우에게 대조(待詔) 액정(掖庭)의 왕장(王昭君)을 하사해 연씨로 삼게 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사진 = 왕소군과 호한야선우]


대조는 황제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아직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액정은 후궁을 말한다.
그러니까 후궁 가운데 황제의 부름을 받지 않은 왕장을 선우에게 시집보내 선우의 부인, 즉 연씨로 삼게 했다는 기록이다.

전해지는 야사는 이렇다.
원제는 후궁이 많아 화공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해 책으로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서 한 명을 지명해 침실로 불러들이곤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후궁들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로비했다.

하지만 용모에 자신이 있는 왕소군이 뇌물을 주지 않자 모연수가 일부러 밉게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흉노의 호한야(呼韓邪)선우가 후궁 가운데 한 명을 요구하자 원제는 화첩을 펼쳐 놓고 못생긴 후궁 한 명을 골라 주었다.
그녀가 바로 왕소군이다.

그러나 선우가 왕소군을 데리고 작별인사차 들렀을 때 원제는 왕소군이 빼어난 미인인 것을 알고 애통해 했다.
하지만 한번 약속한 것을 취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제는 혼수준비를 위해 사흘 말미를 달라고 요구했다.

원제는 왕소군과 미앙궁(未央宮)에서 사흘 밤낮을 보낸 뒤 흉노 땅으로 그녀를 보내줬다.
작별하면서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이라는 칭호를 내려줬다.
그리고 화공 모연수는 참형에 처했다는 게 전해지는 얘기다.

왕소군은 비파를 안고 말 위에 올라 선우정이 있는 푸른 도시라는 의미의 후흐호트로 떠났다.
당시의 모습을 당나라 시인 이백은 슬픈 이별처럼 그리고 있다.

"소군이 옥안장에 치맛자락을 스치며 말에 오르자
붉은 두 뺨엔 눈물이 어리네.
오늘은 한나라의 궁녀 몸이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의 첩의 신세라."

역시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소군원(沼君怨)이라는 시에서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즉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구나." 하고 그녀의 한을 나타냈다.

춘래불사춘은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JP 김종필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등장을 경계하면서 인용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간간히 정치판에서 이 말이 등장하기도 한다.

소군을 소재로 한 중국의 시만 수백편이 된다고 할 만큼 왕소군은 후세 중국인들에게 관심인물이었다.
소군이 흉노로 떠날 때 구경 나온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으며 하늘을 나르던 기러기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날개 짓을 멈춰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낙안(落雁)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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