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의 출연 역시 ‘욜로’의 연장 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원조 한류 스타’인 소지섭이 1945년 일제 강점기 배경 그것도 일본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대본을 보기도 전에 출연을 결정했어요. 나중에 대본을 봤고 솔직히 (일본 팬들이) 신경 안 쓰였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우리 영화는 역사를 기반으로 만든 상업영화잖아요. 특별히 지장은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일단 저는 팬들을 믿고요. 다만 극단적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는 거죠.”
시작은 류승완 감독과의 약속이었다. 앞서 몇 차례나 러브콜을 받았지만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아”서 출연을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으로 주는 작품일 것 같아”서 ‘군함도’는 대본을 보지도 않고 덜컥 출연을 약속했다. “지나가는 말로 밥 한번 먹자”는 약속도 하지 않는 소지섭이기에 말로 뱉은 건 꼭 지키고자 했다고.
류 감독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넘쳐났지만, 대본도 보지 않은 데다가 기존 작품과 스타일도 달랐으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본을 먼저 봤으면 고민했을 것 같아요. 하하하. 하지만 약속은 꼭 지켜야 하니까요. 하기로 했으니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칠성 역만 고민하기로 했죠.”
종로 일대를 평정한 경성 최고의 주먹. 칠성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지는 건 절대 못 참는 남자 중의 남자다. 군함도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일본인들의 강압적 태도에 굴욕을 느끼고 눈엣가시 같은 조선인 노무계원을 제압한 뒤 새로운 감투를 쓴다.
“칠성은 본능에 충실한 인물이에요. 선과 악으로 나누기보다는 지는 것이 싫고, 창피한 게 싫은 단순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감독님께서 인물을 잘 만들어놓으셔서 따로 고민하거나 디테일을 짜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감독님이 만든 ‘틀’ 안에서 고민했던 거죠.”
‘군함도’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다양한 인물군상을 그려내는 만큼 칠성과 말년(이정현 분)의 이야기는 다소 함축적으로 표현되곤 한다. ‘조선 최고의 주먹’이라거나 말년과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아쉬운 건 없어요. 극을 끌고 가는 건 강옥(황정민 분)이기 때문이죠. 칠성과 말년의 이야기까지 그린다면 오히려 시선이 분산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칠성을 위해 가장 많이 신경 쓴 것은 무엇일까? 소지섭은 단박에 “액션”이라고 답했다. 거친 액션을 통해 칠성의 치열한 삶이나 성격 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액션은 한 달 반가량 연습했어요. 감독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워낙 디렉션이 정확하신 분들이라서 틀 안에서 활동하고자 했어요.”
감독이 요구하는 바를 알아채고 그려내는 것은 소지섭의 몫이었다. 그래서일까? 정두홍 무술 감독은 그의 액션을 칭찬하며 ‘천재’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통 배우들이 몸으로 (순서를) 익힌다면 저는 반대거든요. 눈으로 보고 외운 다음에 몸으로 표현하는 편이거든요. 그런 모습이 새로워서 (정두홍 감독이) 칭찬해주신 것 같아요.”
‘액션 천재’ 소지섭이 빛을 발하는 것은 역시 목욕탕 신이 아닐까? 노무계원 자리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격렬하게 치고받는 모습이 인상 깊은 신이다.
“그 장면을 이틀 동안 찍었어요. 빨리 찍어야 해서 준비도 많이 했었죠. 개인적으로는 칠성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신이기도 하고, ‘군함도’의 첫 액션이라 좋아해요.”
액션 중 가장 어렵다는 맨몸 액션. 그것도 목욕탕을 배경으로 벌이는 거친 액션 때문에 “위험할 것 같다”는 인상이 컸다. 하지만 소지섭은 오히려 “액션 노하우가 많이 녹아있는 장면”이라고 자신했다.
“목욕탕 타일이라 위험해 보이지만 사실 그건 매트에요. 다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배제했죠. 감독님이 워낙 액션을 잘 아시니까 불필요한 건 다 빼고 가더라고요. 안전하게 잘 찍었어요.”
결과 역시 만족스러웠다. 한 마리 호랑이 같은 모습을 원했던 류 감독의 바람처럼 목욕탕신 속 소지섭의 모습은 야성(野性) 그 자체였다.
“(칠성 캐릭터에) 아쉬움도 있지만 제가 그동안 했던 연기 패턴과 달라서 속이 시원했어요. 말 없고 속으로 삭이는 캐릭터를 자주 보여드렸었는데 이번에는 시원시원하게 욕도 하고 소리도 질러봤거든요. 사실 저는 대사보다 눈으로 연기하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요.”
그가 즐기는 눈빛 연기는 멜로에서 활용됐다. 극 중 칠성은 액션뿐만 아니라 멜로적인 부분 역시 도맡고 있는 상황. 위안부 피해자인 말년에 동질감을 느끼고 차근차근 마음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묵직하게 그려내 눈길을 끌었다.
“저는 조금 오그라들었어요. 하하하. 드라마에서는 그런 모습을 자주 보여드렸지만, 영화에서는 처음이라서요. 감독님도 그런 걸 잘 못 견디시더라고요. 키스신도 못 찍는다고 하시더라고요.”
말년과의 멜로 무드가 오그라든다며 멋쩍어했지만,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이정현에 대해 칭찬을 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정현 씨는 아주 큰 사람이에요. 연기할 때는 더더욱. 전 한 번도 그가 작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힘들고 치욕스러운 장면도 많았는데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잘 임해줬죠.”
영화 ‘군함도’는 소지섭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역사관이나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연으로서 여러 가지 점들을 느끼고 깨닫게 됐다.
“역사에 관한 부분들이 가장 그렇죠. 전 부끄럽지만 영화를 찍기 전엔 ‘군함도’에 관해 잘 몰랐거든요. 저처럼 ‘군함도’를 잘 몰랐던 관객분들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촬영 한 번 했다고 어떻게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겠어요. 다만 이번 작품으로 ‘군함도’에 대한 관심을 갖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군함도’에 대한 배우·제작진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화를 찍기 전부터 촬영에 임할 때, 작품을 내놓은 지금까지 묵직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지섭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고백에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죠. 역사나 영화에 피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제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니까요.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죠. 조심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의 대답에서 유추할 수 있듯 소지섭은 명확한 배우다. 모호한 단어나 문장도 쓰지 않는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도 섣부른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실천하고 있는 욜로 라이프로도 이어졌다. 관심이 있는 분야는 깊이 있게 알고자 했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자 했다.
“네티즌들이 ‘욜로’의 정석이라 부른다”고 하자, 그는 “꾸준히 하면 된다”며 호방하게 웃었다.
“꾸준히 하면 결국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사실 시작할 땐 그렇지 않았거든요. 하물며 측근들도 말렸거든요. 팬들은 저를 포기한 상태고요. 하하하.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해야 해요.”
소지섭의 소속사 51K는 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영화사 찬란과 외화 수입을 병행하기도 하고 출판까지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영화수입이에요. 찬란이라는 좋은 파트너가 있고 그분들께서 마켓에서 영화를 사오면 저는 발만 얹는 거라서. 거창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기가 참 그래요. 하하하. 기회가 된다면 저도 함께 마켓에 가보고 싶어요. 점점 더 깊이를 더하고 싶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돈을 벌고 싶은 분야기도 하고요. 왜냐고요? 그래야 또 할 수 있으니까요.”
엔터테인먼트·영화수입·출판 등 다양한 분야는 결국 연기로 귀결된다. 소지섭은 이러한 에너지를 통해 힘을 얻고 연기를 할 수 있다고 거들었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거죠. 전 취미라는 말을 안 좋아해요. 취미라는 게 누군가에게는 생업이기도 하니까. 상대가 상처받을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누군가는 제게 ‘돈이 많으니 취미로 하겠지’라고 하시지만 그렇지 않아요. 나름대로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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