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경운 서광한의원 원장[사진=김봉철 기자 nicebong@]
학생들의 대학 진로 역시 ‘본국’인 대만으로 진학하거나, 한국에서 공부하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한국으로 넘어온 화교 1세대들은 자식들에게 대만 대학 입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척박한 한국 생활보다는 대만에서 취직을 하고 시민권을 따서 안정된 생활을 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한국 대학에 진학해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다.
하 원장은 “어차피 한의학은 중국에서 비롯된 의술이기 때문에 화교인 나에게는 큰 장점이 됐다”면서 “돈과 명예를 떠나 의술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주차이나는 하 원장을 만나 한국 화교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떤 계기로 한국에 정착하게 됐나.
“나는 대만 국적의 구(舊)화교다. 아버지는 1921년생인데 1936년, 16살 때 한국에 들어와서 대구에서 배달부터 시작해 구두도 닦고 고생 많이 하셨다. 그러다 대구에 신성루라는 큰 중화요리점을 차리셨고 유명해졌다. 그 당시엔 산둥(山東)성 인구가 너무 많아서 먹을 게 없어서 가까운 한국으로 많이들 넘어왔다.(웃음) 아버지는 한국과 중국을 오갔었는데 6·25 전쟁이 나서 결국 중국으로 못 돌아갔다.”
-많은 직업 중에 한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화교들이 중화요리로 돈을 벌긴 버는데 다들하니까 경쟁이 치열했다. 원래는 나도 중화요리를 공부하러 대만 대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힘들다고 말리셨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중화요리업에 종사하시면서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의 권유가 컸다. 그래서 한의대에 진학하게 됐다.”
-대구 화교인데 특이하게 인천에 정착하게 됐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나.
“1989년에 대구한의대 졸업했는데 지인 소개로 무작정 인천 도화동으로 넘어왔다. 오자마자 근무하는 한의원에서 집사람(김서연 경영원장)을 만났다. 결혼을 하게 됐고 현재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8년 동안 직업 한의사로 근무한 후 지금의 숭의동에 서광한의원을 개원하게 됐다.”
-한국인과의 결혼에 대해 반대는 없었나.
“집사람은 경영학 석사로 현재 한의원 경영원장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사실상 국제결혼인 데다 양쪽 집안이 모두 보수적이라 반대가 심했다. 화교들은 대출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한 장을 만들기도 힘들던 시절이었다. 사업적으로는 한국인과 결혼한 내가 덕을 많이 봤다.(웃음)”
-한의사가 되기까지 어려웠던 점은?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적인 편견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본다. 학문적으로는 원서가 한문이라 오히려 양방보다는 쉬웠다. 한국인들과의 경쟁에서도 약간 유리한 측면이 있다.”
-화교한의사들은 단체는 따로 있는지.
“모두 대한한의사협회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어 공식적인 단체는 없다. 요새 젊은 화교 한의사들도 많이 생기고 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친목회 정도로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 내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내 354-F(인천)지구 3지역에서 29년째 활동하고 있다. 인화라이온스클럽은 인천 화교들로만 구성된 봉사단체로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매주 화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치매 어르신들에게 침술 봉사를 하고 있다. 자장면을 대접하는 봉사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끝으로 한국 화교 사회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면.
“화교들은 외국인이지만 한국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처우가 나아졌지만, 앞으로 갈 길도 멀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고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 양성에도 힘쓰려고 한다. 인천에서 결혼하고, 애도 낳고 돈도 벌었다. 지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환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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