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도 비슷한 용어가 있다.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다. ‘사토리’는 ‘도를 깨닫다’는 의미다. 1987~1996년 사이에 일본에서 태어난 청년 세대를 일컫는 사토리 세대는 극도의 현실주의적 양상을 보인다. 돈벌이는 물론 출세에도 관심 없는 젊은이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중국의 청년들은 어떨까. 나라가 잘 나가니 청년들도 의욕이 넘칠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중국 청년들 사이에 희망 상실을 의미하는 ‘상(喪)문화’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문화는 생존을 위한 현실의 중압감과 사회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블랙 유머를 말한다. 이 상문화에 빠지면 의기소침이나 절망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야기해 무기력하고 냉담한 심리상태를 갖게 된다.
‘상(喪)’이라는 글자는 ‘상실하다’, ‘좌절하다’, ‘의욕이 꺾이다’, ‘실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각박한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꿈을 잃은 채 판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정서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상문화다. 그러니까 상문화는 ‘상실의 문화’나 ‘좌절의 문화’인 셈이다.
상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상차(喪茶)’다. 원래 상차는 중국 최대 배달 애플리케이션 어러머(餓了麽)와 중국 온라인 포털 사이트 왕이신문(網易新聞)이 지난 4월 말에 4일간의 일정으로 팝업 스토어 형식으로 공동 기획한 일회성 행사였다. 행사 슬로건은 ‘하루 한 잔의 부정적 에너지’였다.
젊은이들의 고단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본 이 상차 행사는 소비 열풍으로 이어졌고, 상차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상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젊은층 사이에 그만큼 부정적인 에너지가 팽배하다는 의미다. 중국의 젊은 세대들이 상실과 좌절을 담은 상문화라는 키워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며 서로 소통하고 있다.
상차 제품들은 하나같이 내용이 조소적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인생 허비 홍차, 고백 거절당한 녹차, 여전히 솔로 녹차, 매일 야근 스무디, 오르지 않는 월급 과일차, 집값 떨어져도 살 돈 없는 과일 주스, 죽고 싶어도 죽을 용기 없는 마끼아또, 당신이 못생긴 이유는 살쪄서 만이 아님 녹차 라떼, 전 남자친구가 나보다 잘 삼 라떼, 전 여자 친구가 재벌 2세와 결혼했다 카푸치노, 성형할 돈 없는 밀크셰이크 등이 그것이다.
상차 점포 내 상문화 문구도 눈길을 끈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인생은 본래 끊임없는 내리막길을 걷는 거예요’, ‘젊은이, 현재 돈이 없으면 어떠한가? 앞으로 돈이 없는 날들이 길게 남아 있네’, ‘나를 때려줘서 고마워요! 누워 있으니 만사태평하네요’, ‘가끔 노력하지 않으면 무엇이 절망인지 몰라요’, ‘내가 오늘도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나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가 아님,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 등이다.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희망이 없다는 뜻인 무망(無望)감과 좌절감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상차 점포들의 이같은 부정적 에너지 마케팅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현실을 정확하고 재미있게 반영하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상문화는 비록 표현이 부정적이고 거칠기는 하지만 고단한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중국 청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연애와 결혼, 출산에다 희망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에 빚대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진 우리의 N포 세대 청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문화가 잘 드러난 드라마가 있다. 중국 젊은 세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이나 방영됐던 ‘워아이워지아(我爱我家)’라는 드라마다. 중국의 유명 배우 거요우(葛優)는 드라마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모습이 상문화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중국 젊은이들은 ‘포기했다’, ‘하기 싫다’, ‘관심 없다’, ‘귀찮다’ 등의 표현을 할 때 ‘거요우탕(葛優躺)’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거요우탕’이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거요우탕’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표현으로 인상 깊었던 우리나라 광고 카피를 연상시킨다.
사회 분위기와 시장 흐름에 민감한 중국 기업들은 자국 청년들의 이런 정서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고객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새로운 소비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쓰촨(四川)성 성도인 청두(成都)에서는 ‘희망 없는 요구르트’라는 음료가 출시되기도 했다. 음료가 인기를 얻자 후속 시리즈로 ‘서먹한 요구르트’, ‘마음이 아픈 요구르트’가 시리즈로 나왔다.
대만에서는 일본 커피 브랜드인 UCC 커피가 자사 제품 홍보를 위해 ‘오늘 당신이 하루 종일 힘들어 개와 같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이 큰 오해를 하고 있네요. 개도 당신보다 힘들진 않아요’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모티콘 표정에서도 상문화를 읽을 수 있다. 상실과 좌절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상문화 이모티콘에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PEPE개구리(青蛙)’, 소파에 누운 채 축 쳐진 모습의 ‘절인 생선(鹹魚)’, 한때 유명한 연예인이었지만 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며 사는 우울한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등이 있다.
청년들이 현실적으로 인생의 성공 계단(명문대학 입학→좋은 직장 취직→내 집 마련→결혼)에서 멀어지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을 상문화를 통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저명한 신문 평론가인 정위리(曾于里)는 “상문화는 삶이 고단한 젊은이들이 온화한 방식으로 세상에 항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며 “상(喪)의 심리 상태는 젊은 층이 자기 스스로 기대와 스트레스를 낮춰 만약에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크게 절망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 반응”이라고 상문화를 정의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인 프로스트앤설리반(Frost & Sullivan)은 중국의 상문화 확산 배경을 중년 위기, 솔로, 높은 부동산 가격, 996(오전 9시 출근~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 잦은 야근 등 다섯 가지로 분석했다. 현대 사회인들의 보편적 관심사이기도 한 이 다섯 가지가 중국 사람들에게 상실감(喪)을 느끼게 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프로스트앤설리반은 또 상문화에 젖어들면 일을 뒤로 미루기, 밤새우기, 집돌이·집순이(사교활동이나 야외활동보다는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 좋아해 밖으로 잘 나오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 한숨 쉬기, 자조적인 표현 내뱉기 등의 경향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야근 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상문화의 민감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종별로는 인터넷 업계 종사자들에게 부정적 에너지 지수가 25%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이 높은 반면 노동 강도가 세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광고업(20%), 학생(16%), 개인사업(10%), 교사(8%), 의무요원(7%), 공무원(6%)이 뒤를 이었다. 부정적 에너지 지수가 가장 낮은 업종은 각각 1%대인 미디어 종사자와 과학연구원이었다.
중국에서도 계층 고착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자수성가, 즉 ‘개천에서 용 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문화는 ‘계층 사다리’가 사라져가고 있는 시대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상문화가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시킴으로써 현실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극복해내려는 자기방어적인 심리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문화는 일차원적인 부정적 에너지 표출 차원을 넘어섰다. 문화와 오락 산업의 창의적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상문화가 이제 중국의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다. 상문화 코드를 알아야 젊은 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KOTRA 관계자는 “중국에 상문화가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상문화를 마케팅 방법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다”며 “현지 진출 기업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장 트렌드를 심도 있게 분석해 기업 마케팅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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