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130년사③] ‘낙엽귀근(落葉歸根)’ 넘어 ‘낙지생근(落地生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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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입력 2017-08-3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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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차이나-인천대 중국학술원 공동기획

  • 초기 한국 화교는 ‘철새 이민’…세월 흐를수록 ‘죽어 묻힐 곳’으로

옛 인천화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사진=인천화교협회제공 제공]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해외이주민 수가 무려 200만명에 달한다. 수치만 놓고 보면, 세간의 말처럼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형국이다.

그러나 수많은 종족집단 그리고 그들이 몸에 지니고 들어오는 다양한 삶의 양식들이 기존의 토착문화와 한데 어우러지는 진정한 다문화공동체가 이 땅에서 구현될 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낯선 이들에 대한 심리적 편견과 제도적 배제가 제대로 극복되지 않는 한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해외이주는 항상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지만, 고생의 열매를 맺기 위해 당사자들은 지난한 삶의 고투와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근대 이후, 130년이 넘는 이주역사를 지닌 한국 화교사회 역시 단속(斷續)과 부침(浮沈), 이산(離散)과 집중(集中)의 간난(艱難)세월을 거듭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가 다문화 사회를 용인하고 혹은 그것을 지향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눈여겨볼 집단이 바로 화교다.

화교는 해외이주민 가운데 가장 오랜 한반도 거주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느새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돼 있고 한국인의 일상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다.

대다수 한국 화교들의 원향(原鄕)이라 할 수 있는 산둥(山東)은 유달리 재난과 전란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산둥사람들은 가뭄, 홍수, 내전 등으로 황폐해진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들이 주로 옮겨간 곳은 중국의 관둥(關東), 지금의 동북3성(東北三省)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만주(滿洲)가 바로 그곳이다. 1651년부터 1949년까지 299년간 이 지역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 산둥인들의 수가 2500만명이었다고 하니, 그 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촹관둥(闖關東)’이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여기고 찾아갔던 중국 동북지역마저 러·일전쟁 등 제국주의 간 다툼의 장으로 변했다.

19세기 말부터 촹관둥 행렬의 일부가 자신들의 최종 행선지로 한반도를 선택하게 된 이유다.

한국의 화교들은 이를 ‘고려’로 이주한다 해서 ‘촹가오리(闖高麗)’라고 불렀다. 이들은 산둥의 웨이하이(威海)나 옌타이(煙台) 등지에서 바닷길을 통해 인천으로 오거나 랴오닝(遼寧)의 안둥(安東, 지금의 단둥)을 통해 신의주로 혹은 광활한 만주 벌판을 지나 조선북부로 건너오는 육로를 택하기도 했다.

결국 자연재해로 인한 경작지의 유실, 의화단(義和團)사건 등에 따른 중국 화북지역의 혼란, 군벌정치의 폭정, 열강의 침략에 의한 약탈과 실업이 산둥사람들을 물설고 낯선 이곳 한반도로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다.

개중에는 적극적인 판로확장을 위해 배를 띄운 상인들도 있었고 경작을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온 농민들도 있었다. 호구지책으로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 이 지역으로 건너온 무지렁이 ‘꾸리(苦力)’들도 적지 않았다.

당초 이들은 조선 땅에서 많은 돈을 벌어 가벼운 걸음으로 고향 땅을 밟는 금의환향을 꿈꿨을 것이다.

화교의 조선이주 연혁. [사진=인천화교협회 제공]


한때 화교의 전형적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던 것이 이른바 ‘낙엽귀근(落葉歸根)’이다.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초창기 화교들이 봄에 왔다가 가을에 돌아가는 이른바 ‘철새이민’, ‘계절이민’의 형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뜻하지 않게 객지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에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기’를 원하는 귀장(歸葬)의 풍습을 잃지 않았던 것도 낙엽귀근의 연장선상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결국 돌아가지 못했고 돌아가지 않았다. 설혹 돌아갔다가도 대부분은 다시 돌아와야 했다.

청·일전쟁, 만보산(萬寶山)사건, 중·일전쟁 등 잇따른 참화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그 어느 곳인가에는 본인들의 점포가 있었고 땅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피와 땀이 진하게 배어있기에 그랬다.

미처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어느새 한반도는 그들이 기어이 살아야만 하고 마땅히 죽어 묻혀야만 하는 ‘낙지생근(落地生根)’의 공간과 장소가 돼 버린 것이다.

이주가 그랬듯 거주 역시 순조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들의 타향살이는 녹록치 않은 삶, 그 자체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내에서 식민지 조선인과도 구별됐고, 여타 외국인과도 다른 취급을 받는 일종의 ‘특수신분’이었다. 때로는 적국민의 신분으로 오랜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일본제국의 확장을 역이용해 자신들의 활동범위와 규모를 확대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열악한 이방인의 신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왜 당신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 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에게선 어김없이 “그렇게 하는 게 우리 전통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처럼 화교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과거와 경험 즉, 전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화교의 ‘문화’는 화교 삶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화교는 오랜 세월 거주국의 주류사회에 동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조상들의 문화와 상징적 혹은 실제적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아울러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 나름의 ‘중국적’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그랬다.

사실 화교들이 새로운 삶의 무대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와 관행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전통적 관행과 문화적 관습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화교사회 내부의 단결과 지속을 담보하는 데에는 유리할 수 있지만, 화교사회 외부라 할 수 있는 거주국 사회의 이질적 문화구조와 접촉할 때는 하나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화의 변용과 재구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한국 화교의 경우에도 주거, 복장, 생활양식 등 문화의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측면에서 한국 주류사회에 자연스럽게 동화돼 왔다.

인천화교학교 주변에서 중국어보다는 한국어가 보다 많이 들린다는 점에서 언어적 사회화도 점차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그동안의 역사적 고난과 사회·경제적 차별을 감내하는 속에서 터득한 나름의 생존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각종 개별적 문화 요소들은 격동하는 외부사회의 역사변화의 추세에 따라 쇠락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화교들의 삶과 혈액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른바 전통적 문화체계는 고갈되지 않은 채 새로운 사회문화적 맥락에 적응하며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민자들이라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이 거스를 수 없는 동화의 흐름 속에서도 한국 화교들이 스스로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간에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발전시켜올 수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한국 화교는 더 이상 거대 이주민집단은 아니기에 중국의 전통적인 종족(宗族) 관념이 실제적인 조직이나 제대로 된 형식으로 남아있다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관혼상제, 세시풍속, 민간신앙 등에 의한 각종 모임들을 통해 적어도 화교사회라는 경계 즉, ‘화교다움’만큼은 여전히 허물어트리지 않고 있다.

특히, 제례와 상례 등에서 보이는 차별적인 특징들은 화교로서의 기본적인 가치지향을 보여주고 있고 화교사회의 미덕과 도덕적 기준을 배양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사회는 혈연, 지연, 학연, 업연(業緣)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중국의 ‘꽌시(關係)’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구현 중이다.

설령 그것이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비쳐진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공간적 경험은 그러한 문화 원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늘날 젊은 세대 화교들은 그들의 부모세대가 각종 억압과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고수해왔던 전통적인 공동체의 문화 원리와 가치체계에 대해 그 효용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시선과 비합리적인 법과 제도가 교정되지 않고 존속하는 한, 화교사회의 전통과 문화는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를 이어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를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의 존재로 생각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 묻힐 낙지생근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더 이상 피해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는 현명한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다문화 사회와 문화 혼종의 열린 공간을 지향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기껍게 짊어져야 할 소임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아우를 때, 통칭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안에 화교는 없다.

◆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국립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 겸 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및 화교관행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의 마주보기’(공저), ‘그래도 살아야 했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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