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정주문명권과 유목문명권을 가르는 문명의 경계선이었다. 그렇게 보면 칭기스칸은 흉노 이후 천년이상의 시간이 지나 다시 이 담을 넘어 정주문명권을 장악한 유목 문명권의 대표 주자였다.
▶ 인부들이 거주하던 곳, 거용관
용인이 머무는 거주지라는 뜻을 지닌 거용관은 과거 진시황 시절 이 장성을 만들 때 강제로 모집해 온 인부들을 이곳에 거주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거용관은 두 개의 관문을 가지고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을 남구(南口), 그리고 북쪽에 있는 것을 팔달령(八達嶺)이라고 부르고 있다.
▶ 연경팔경 중 하나, 수려한 경관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곳을 거용첩취(居鏞疊翠 : 산들이 겹쳐져있는 거용)라고 해서 연경팔경의 하나로 꼽고 있는 모양이다.
▶ 증․개축으로 옛 모습 크게 변해
지금 보는 거용관의 모습은 원나라 말과 명나라 때 개축된 것이고 그 이전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운대(雲臺)라는 주춧돌 모양의 석조 문뿐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 끝에 있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의 양쪽에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의 부조(浮彫)가 있고 티베트어와 몽골어 그리고 한자 등 여러 가지 문자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현재 보는 거용관은 수차례 그 모습이 변해 칭기스칸이 이곳을 장악할 때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됐다. 그러나 적어도 성벽의 위치는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 관광로로 변한 순찰로
장성 안쪽으로는 당시 주둔군 사령관이 기거했던 숙소와 병졸들의 막사가 있고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낸 장군들의 공을 기리는 충렬사 몇 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용관에 서서 보면 양편으로 산 능선을 따라 구비 구비 장성이 뻗어 있고 장성의 중간 중간에는 성대(城臺)가 돌출물로 솟아 나와 있다.
짧은 곳은 5백 미터, 긴 곳은 2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서 세워져 있는 이 성대는 당시 이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던 곳이었다. 성벽 위로는 폭 3미터 가량의 통로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병사들의 순찰로였던 통로는 지금 관광객들의 관광로로 그 역할이 변해 있었다.
▶ 역사의 불가사의에 취한 관광객들
그러나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은 북경하늘을 뒤덮은 매연과 먼지가 이곳까지 번져 와 주변을 경관을 선명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기습공격에 무너진 난공불락의 성
당시 이곳을 정탐한 이슬람 상인 자파르는 거용관 앞쪽에 빽빽이 우거진 나무 숲 사이 어딘가에 나 있던 길을 따라 병사들과 재갈 물린 말을 끌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잠에 취해있던 많은 금나라 장수들과 병사들은 미처 잠에서 깨기도 전에 몽골군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공불락의 성도 정면 대결이 이루어졌을 때의 얘기지 이처럼 기습 공격을 당하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희생 없이 손쉽게 이 천혜의 요새를 손에 넣은 칭기스칸의 군대는 금나라의 수도 중도의 턱 아래 곧바로 칼끝을 겨눌 수 있었다.
▶ 金, 중도 버리고 변경으로 천도
하지만 이후 금나라 스스로 무너져 버려 더 이상의 공격도 무의미해졌다.
금의 선종은 언제 몽골군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중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탈출이었다. 신하들의 반대는 무시했다.
▶ 푸른 군대 중도성 입성
금나라의 천도 소식을 들은 칭기스칸은 금나라가 남쪽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해 전쟁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다시 전쟁에 나섰다. 이번 중도 공격의 중임은 사준마의 한사람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파죽지세로 밀려가는 무칼리의 군대 앞에 이미 사기가 꺾인 금나라의 군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47명의 장군과 32개의 성이 투항을 했다. 사방에서 몽골군이 조여 오자 중도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보복과 약탈..불타는 중도
아수라장이 된 성안으로 들어 온 몽골군은 도시 전역에 불을 지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불바다가 된 성안에서 약탈은 한 달 동안이나 허용됐다. 전투가 끝난 뒤 이어지는 학살과 약탈은 잔인하고 철저한 것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입장에서 보면 몽골군의 야만성은 치를 떨 정도였을 것이다.
▶ 살아온 바탕에서 습관화된 약탈행위
초기 전쟁에서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가 저지른 잔혹한 행위는 원초적으로 유목민들에게 전쟁은 으레 죽이고 약탈하는 행위가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의식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금나라라는 대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약탈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개개인으로 보면 결코 잔인하거나 사악하지 않고 어느 나라, 어느 문명권에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나름대로의 도덕도 있고 나름대로의 법과 관습도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가운데는 건전한 상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아끼고 보호하면서 적이었던 남에게는 그렇게 냉정하고 잔인했던 것은 결국 살아온 바탕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경험의 날개 얻은 對金전쟁
동방의 황제가 된 무칼리는 이후 동방 경영의 바탕을 마련하는 동시에 아직도 남쪽에 버티고 있는 금나라를 끝없이 몰아 붙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중도의 함락으로 금나라는 사실상 그 생명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쪽으로 밀려간 금나라가 완전히 중국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20년 후의 일이지만 그 동안은 단지 생명을 연장해 가고 있었을 뿐 살아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으로서 중원 땅을 장악했던 금 왕조는 다른 이민족에게 그 역할을 넘기고 날개를 접어 가고 있었다.
반면 유목 문명권에 있던 몽골족은 농경문화를 지닌 정착 문명권의 국가를 성공적으로 공략함으로써 앞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험이라는 날개를 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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