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37] 만리장성은 어떻게 무너졌나? ③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04 10:39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북경 북쪽의 천혜요새, 거용관

[사진 = 거용관]

북경에서 동북 방향으로 자동차를 달려 50분쯤 나아가면 산림이 우거진 험난한 산과 그 산의 능선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성을 만나게 된다. 고개를 돌 때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장성은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산채를 휘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중심지가 된 북경, 즉 중도, 대도라 불리었던 수도를 지켜 주는 북쪽의 천혜 요새, 거용관(居庸關)이다.
 

[사진 = 만리장성]

그 곳의 만리장성은 경사 50도 전후의 험난한 산을 남북으로 가르면서 동서로 달려가고 있다. 이 장성은 발해 만에 자리한 동쪽 끝의 산해관(山海關)에서부터 서역의 가욕관(嘉峪關)까지 장장 6,500킬로미터, 우리의 이수(里數)로 만 5천리가 넘게 이어지고 있다.

만리장성은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정주문명권과 유목문명권을 가르는 문명의 경계선이었다. 그렇게 보면 칭기스칸은 흉노 이후 천년이상의 시간이 지나 다시 이 담을 넘어 정주문명권을 장악한 유목 문명권의 대표 주자였다.

▶ 인부들이 거주하던 곳, 거용관
용인이 머무는 거주지라는 뜻을 지닌 거용관은 과거 진시황 시절 이 장성을 만들 때 강제로 모집해 온 인부들을 이곳에 거주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거용관은 두 개의 관문을 가지고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을 남구(南口), 그리고 북쪽에 있는 것을 팔달령(八達嶺)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진 = 거용관 근처 만리장성]

사통팔달(四通八達), 어느 쪽으로 통한다는 이 말에서 빌려 온 이름처럼 팔달령은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북경을 들러 만리장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첫발을 딛는 곳이 대부분 이곳으로 여기서부터 관광객들은 산을 휘감으며 하늘을 향하듯 끝없이 이어지는 장성을 타고 오른다. 거용관은 이 팔달령 보다 경사가 더욱 심하고 험난한 지세에 자리 잡고 있다.

▶ 연경팔경 중 하나, 수려한 경관

[사진 = 거용관 근처 만리장성]

거용관에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는 장성의 모습은 일품이다. 겹겹이 쌓여 있는 봉우리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계곡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맑은 샘물과 아름다운 수목 그리고 여러 가지 새들의 지저귐에 매료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곳을 거용첩취(居鏞疊翠 : 산들이 겹쳐져있는 거용)라고 해서 연경팔경의 하나로 꼽고 있는 모양이다.

▶ 증․개축으로 옛 모습 크게 변해
지금 보는 거용관의 모습은 원나라 말과 명나라 때 개축된 것이고 그 이전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운대(雲臺)라는 주춧돌 모양의 석조 문뿐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 끝에 있는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의 양쪽에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의 부조(浮彫)가 있고 티베트어와 몽골어 그리고 한자 등 여러 가지 문자가 새겨져 있다.

따라서 현재 보는 거용관은 수차례 그 모습이 변해 칭기스칸이 이곳을 장악할 때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됐다. 그러나 적어도 성벽의 위치는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 관광로로 변한 순찰로

[사진 = 거용관 깃발]

거용관은 평화의 시절에는 북방 유목민과 한인들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지만 전시에는 접근이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였다. 3층 누각 형식으로 지어진 거용관은 말하자면 수도 방위를 책임지는 최후의 방어선에 자리한 OP(Out Post: 전초진지)나 마찬가지였다.

장성 안쪽으로는 당시 주둔군 사령관이 기거했던 숙소와 병졸들의 막사가 있고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막아낸 장군들의 공을 기리는 충렬사 몇 채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용관에 서서 보면 양편으로 산 능선을 따라 구비 구비 장성이 뻗어 있고 장성의 중간 중간에는 성대(城臺)가 돌출물로 솟아 나와 있다.

짧은 곳은 5백 미터, 긴 곳은 2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서 세워져 있는 이 성대는 당시 이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던 곳이었다. 성벽 위로는 폭 3미터 가량의 통로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병사들의 순찰로였던 통로는 지금 관광객들의 관광로로 그 역할이 변해 있었다.

▶ 역사의 불가사의에 취한 관광객들

[사진 = 만리장성 관광객]

성벽 위 통로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거의 통로를 꽉 메운 관광객들은 중국이 남긴 역사의 불가사의(不可思議)에 취한 듯 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내려오면서 가장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구조물이 만리장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은 북경하늘을 뒤덮은 매연과 먼지가 이곳까지 번져 와 주변을 경관을 선명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 기습공격에 무너진 난공불락의 성
당시 이곳을 정탐한 이슬람 상인 자파르는 거용관 앞쪽에 빽빽이 우거진 나무 숲 사이 어딘가에 나 있던 길을 따라 병사들과 재갈 물린 말을 끌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잠에 취해있던 많은 금나라 장수들과 병사들은 미처 잠에서 깨기도 전에 몽골군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사진 = 음산산맥(중국 천연 방어막)]

이 험난한 요새를 정면공격을 통해 함락시키려 했다면 아마도 칭기스칸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거나 뜻을 이루었다고 해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전쟁을 계속 하면서 몽골군은 공성전에 익숙해지고 전력도 강화됐지만 초기 전쟁에서는 이러한 형식의 전투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공불락의 성도 정면 대결이 이루어졌을 때의 얘기지 이처럼 기습 공격을 당하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희생 없이 손쉽게 이 천혜의 요새를 손에 넣은 칭기스칸의 군대는 금나라의 수도 중도의 턱 아래 곧바로 칼끝을 겨눌 수 있었다.

▶ 金, 중도 버리고 변경으로 천도
하지만 이후 금나라 스스로 무너져 버려 더 이상의 공격도 무의미해졌다.
금의 선종은 언제 몽골군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중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탈출이었다. 신하들의 반대는 무시했다.
 

[사진 = 변경(개봉, 금나라 임시수도)]

황태자를 중도에 남겨 놓고 새 수도 변경 (汴京: 開封이 수도가 되면서 이름이 바뀜)으로 떠났다. 수도 이전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비겁한 황제가 떠나자 민심은 극도로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들이 몽골군에 투항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여기에 황하까지 범람해 민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 푸른 군대 중도성 입성
금나라의 천도 소식을 들은 칭기스칸은 금나라가 남쪽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해 전쟁에 나서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다시 전쟁에 나섰다. 이번 중도 공격의 중임은 사준마의 한사람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파죽지세로 밀려가는 무칼리의 군대 앞에 이미 사기가 꺾인 금나라의 군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47명의 장군과 32개의 성이 투항을 했다. 사방에서 몽골군이 조여 오자 중도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보복과 약탈..불타는 중도
아수라장이 된 성안으로 들어 온 몽골군은 도시 전역에 불을 지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불바다가 된 성안에서 약탈은 한 달 동안이나 허용됐다. 전투가 끝난 뒤 이어지는 학살과 약탈은 잔인하고 철저한 것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측의 입장에서 보면 몽골군의 야만성은 치를 떨 정도였을 것이다.

▶ 살아온 바탕에서 습관화된 약탈행위
초기 전쟁에서 칭기스칸의 푸른 군대가 저지른 잔혹한 행위는 원초적으로 유목민들에게 전쟁은 으레 죽이고 약탈하는 행위가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의식으로 인식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금나라라는 대국의 수도를 손에 넣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약탈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개개인으로 보면 결코 잔인하거나 사악하지 않고 어느 나라, 어느 문명권에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나름대로의 도덕도 있고 나름대로의 법과 관습도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가운데는 건전한 상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아끼고 보호하면서 적이었던 남에게는 그렇게 냉정하고 잔인했던 것은 결국 살아온 바탕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경험의 날개 얻은 對金전쟁

[사진 = 무칼리 추정돔]

칭기스칸은 이번에는 정복한 중국의 땅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무칼리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했다. 무칼리를 권황제로 임명한 칭기스칸은 "중국 땅에서는 무칼리의 명령이 내 명령과 같다"며 그에게 전권을 주었다.

동방의 황제가 된 무칼리는 이후 동방 경영의 바탕을 마련하는 동시에 아직도 남쪽에 버티고 있는 금나라를 끝없이 몰아 붙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중도의 함락으로 금나라는 사실상 그 생명이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쪽으로 밀려간 금나라가 완전히 중국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20년 후의 일이지만 그 동안은 단지 생명을 연장해 가고 있었을 뿐 살아 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으로서 중원 땅을 장악했던 금 왕조는 다른 이민족에게 그 역할을 넘기고 날개를 접어 가고 있었다.

반면 유목 문명권에 있던 몽골족은 농경문화를 지닌 정착 문명권의 국가를 성공적으로 공략함으로써 앞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험이라는 날개를 단 셈이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