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對)호레즘 전쟁은 칭기스칸이 살아있는 동안 치른 전투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마지막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이 당시 세계의 절반을 차지한 세계제국을 이루는 것은 그의 아들과 손자代였다. 다만 칭기스칸은 호레즘 전쟁을 통해 그 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호레즘과의 전쟁은 칭기스칸이 가지고 있는 전술 전략적인 측면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정보전과 홍보전, 공포전략, 이간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전쟁이다. 호레즘과의 전쟁을 결심한 칭기스칸은 사전에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 대상(隊商)을 활용한 사전 정보전
말하자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원칙을 잘 실천했던 것이다. 기고만장해 있던 호레즘의 무하마드는 몽골을 모르는데 칭기스칸은 호레즘에 대한 파악을 철저히 했으니 승패의 결과는 전쟁 전부터 몽골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족 칸의 자리에 오를 때 구사했던 홍보전술을 여기서도 철저히 활용했다. 상인들을 통해서 칭기스칸과 그의 푸른 군대에 대한 소문을 확산시켰다.
"칭기스칸은 장차 세계를 지배할 영웅이다."
"몽골 군대는 최강의 군대이며 이들과 싸워 이길 군대는 없다."
"몽골군대는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지만 저항하면 씨도 남기지 않는 잔인한 군대다."
"칭기스칸은 종교와 인종을 가리지 않는 메시아다."
상인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이 같은 소문들은 호레즘 전 지역으로 널리 번져 갔다. 그 대가로 상인들은 최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교역을 보장받았다.
▶ 호레즘 내 불화 반목 조장
특히 호레즘의 왕궁 내 불화와 반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부추기는 데 주력했다. 투르크인과 이란인 등 복합적으로 구성된 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인 반목은 지배층까지도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책략을 동원해 상호간의 반목과 불신을 심화시켰다. 무하마드의 압정에 의해 야기된 토착 지배층의 불만과 과중한 세금과 폭력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투루칸 카툰 휘하의 한 지휘관의 이름으로 칭기스칸의 군대에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거짓 편지를 만들어 그 것이 무하마드의 손에 들어가도록 만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간책(離間策)을 쓴 것이다. 이처럼 불화가 깊어지도록 조장하자 호레즘은 푸른 군대가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 막 오른 잔인한 피의 전쟁
당시 오트라르성의 지사는 여전히 이날축이 맡고 있었다. 칭기스칸의 원정이 자신의 행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돼 감행됐다는 것을 잘 아는 이날축은 전쟁에서의 패배는 곧 처참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끈질기게 저항했다. 몽골 군대의 진격을 전해들은 무하마드는 이 성의 방어를 위해 5만 명의 군사를 배치했다. 이곳에서 양측의 공방전은 5개월 동안 계속됐다.
▶ 죽음을 각오한 끈질긴 저항
죽음을 각오한 오트라르성의 저항은 완강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투석기를 쏘아 성안으로 돌을 날리고 불화살을 쏘아 성안의 곳곳이 불바다가 됐으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싸움을 지켜보던 칭기스칸은 아들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에게 오트라르성 함락 임무를 맡겨 두고 막내아들 툴루이와 함께 주력군을 이끌고 시르다리아(Syr Darya)강을 건너 부하라(Bukhara)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처참한 죽음 당한 이날축
▶ 곳곳에 그림 같은 오아시스 마을
오트라르에서 12Km 떨어져 있는 샤울리제르라는 소도시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박물관을 만날 수 있었다. 오트라르 성터에서 발굴된 유물과 칭기스칸의 군의 공격 당시의 가상도, 오트라르성 추정도 등이 보관돼 있는 오트라르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의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오트라르성의 추정도는 당시 성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었다. 초원 한가운데 세워진 성 주변에는 운하가 둘러쳐져 있고 성 밖에는 노천 시장이 열려 도자기와 비단 등 여러 가지 물품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고랑 근처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차량의 진입이 금지돼 있어 가는 먼지가 풀썩이는 길을 걸어서 1㎞쯤 가자 6-7미터 높이의 성터가 앞을 가로막았다. 성터의 주변은 홈이 파여진 고랑이 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과거 성을 둘러쌌던 운하의 흔적이었다.
당시 5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무너진 오트라르성은 수백 년 세월에 닳아지고 바람에 깎이면서 흙에 덮이는 동안 이제 옛 모습을 땅속에 묻어 놓은 채 흉물스런 황토 빛 동산으로 변해 있었다. 그 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초원을 노니는 바람과 그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 그리고 사람이 지나는 길에 풀썩이는 모래연기만이 주변에 가득하다.
눈을 들어보니 수백 년 뒤의 후인들이 형성해 놓은 성 밖의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후인들은 그 때의 사정을 얼마나 알까? 세월이 잘라놓은 많은 잔상들을 떠올리며 오트라르성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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