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오아시스의 도시 사마르칸드와 부하라를 끼고 있는 호레즘왕국! 초원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무다리야(Amu Darya)강과 시르다리야(Syr Darya)강이 흐르는 이 지역은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심지로 오래 전부터 번영을 구가하던 곳이었다.

[사진 = 부하라 전경]

[사진 = 사마르칸드 무희]
▶ 스스로 무너진 부하라
칭기스칸 군대가 조여 들어오자 무하마드는 주력부대를 둘로 나누어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에 분산 배치했다. 그때까지 무하마드의 생각은 몽골군이 견고한 요새를 공격하더라도 치명타를 날리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산발적으로 공격하다가 소득 없이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사진 = 부하라 공격도]

[사진 = 부하라 성곽]
군사들이 성을 빠져나가자 견고했던 성은 모래성으로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성안에 있던 원로들은 성문을 열고 칭기스칸 군대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칭기스칸 군대가 무혈입성(無血入城)하도록 길을 터 주었지만 부하라는 결코 무사하지 못했다. 성안은 불길에 휩싸이고 약탈이 뒤따랐다. 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연기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성안에 가득 찼다고 사서(史書)는 적고 있다.

[사진 = 칭기스칸 부하라 연설]
▶ 포로를 화살받이로 앞세우고
사마르칸드성 앞에서 오트라르성을 함락시킨 차가타이군과 오고타이군이 칭기스칸 군대에 합류했다. 칭기스칸은 사마르칸드를 공격하기 위해 진영을 다시 정비했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몽골군은 전선의 전면에 주변 지역의 주민들과 부하라에서 포로로 잡은 병사들을 배치했다. 말하자면 화살받이로 내세운 것이었다.

[사진 = 사마르칸드 공성도]
특히 이제 막 호레즘제국의 수도가 된 사마르칸드는 온통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다음 몽골군의 목표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마르칸드 방어에 투입된 병사의 수는 11만, 그 가운데 6만명은 트루크인 정예부대였고 나머지 5만명은 타지크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 순식간에 번진 투항분위기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호레즘군은 그 수는 많았지만 결집력에 있어서는 몽골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포로를 앞세운 몽골군의 엄청난 규모를 보고 겁에 질려 버렸다. 앞세운 포로들까지 모두 몽골군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오히려 자신들이 열세에 있다고 판단했다. 전투도 시작되기 전에 호레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 = 불타는 코란]
결국 주민들은 대표를 칭기스칸에게 보내 사마르칸드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3만 명의 투르크 병사들이 성 밖으로 나와 투항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그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모두를 처형해 버렸다.
▶ 닷새 만에 접수한 사마르칸드

[사진 = 페허가 된 아프라시압 언덕]
그러나 이들 역시 스스로 내부에서 무너지면서 몽골군에게 승리를 헌납했고 그 결과로 그들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받아야 했다. 칭기스칸은 우선 주민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그런 후에 호레즘 왕국의 수도를 철저히 유린하기 시작했다.

[사진 = 호레즘 장인]
▶ 무하마드 쫓는 저승사자들
사마르칸드가 함락되기 전에 무하마드는 이미 성을 빠져나가 도주 길에 올랐다. 무하마드를 뒤쫓아 처형하는 일은 제베와 수베타이에게 맡겨졌다.
넓은 중동 지역 어디에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무하마드는 결국 카스피해의 아바스쿤이라는 곳의 맞은편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도망쳤다.
제베의 추적대가 이를 알아채고 카스피해로 다가가고 있을 때 무하마드는 도주 중에 얻은 폐병으로 1220년 12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감당하지도 못할 화를 불러들인 무하마드의 무모함은 자신의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도록 만든 것은 물론 이슬람 세계 전체를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으면서 철저히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하마드의 죽음으로 전세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진 = 자랄 웃딘 추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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