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살해한 병수(설경구 분). 늙고 병들어버린 그는 살인을 멈추고 딸 은희(설현 분)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는 점차 기억을 잃어하기만 손끝에 남은 살인의 기억은 습관처럼 남아있다.
어느 날 병수는 접촉사고로 태주(김남길 분)를 만나게 되고 텅 빈 그의 눈을 보며 자신과 같은 성질(性質)을 가졌음을 직감한다. 병수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살인사건이 태주의 짓이라 생각해 경찰에 신고하지만 아무도 병든 병수의 말을 믿지 않는다.
태주는 자신을 의심하는 병수의 곁을 맴돌기 시작하고 급기야 딸 은희에게 접근한다. 병수는 태주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은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지만 애석하게도 기억은 자꾸만 끊기고 망상과 실제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영화”라는 원 감독의 말처럼,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의 강점을 살리되 영화적인 해석을 더하려 노력했다. 그 노력의 흔적은 영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캐릭터의 성격이나 결말 부분에서 가장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캐릭터들은 조금 더 온기를 띠게 되었고 친숙한 이미지로 변모했으며 타당성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에 결말을 달리하며 소설과 영화를 분리, 원작을 변주하며 영화만의 매력을 강조했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날것의 색감을 가진 영상 및 촬영 기법. 원작이 가진 스산함을 영상으로 구현해냈고 교통사고 및 병수가 겪는 혼란 등을 세련된 방법으로 시각화해냈다. 투박하면서도 매끄러운 이음새는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하지만 작품의 장점만큼이나 단점 역시 확실하다. 단단하고 쫀쫀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던 힘은 후반으로 갈수록 달리는 듯하고 고루한 표현이나 예측 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져 맥이 빠지기도 한다. 거기에 은희 캐릭터는 기능적 역할에 그치고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살인마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긴장감 있게 그려지는 것은 좋으나 딸보다는 여성적인 면이 강조돼있다는 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다. 불편할 만큼 짧은 옷을 입고 집안을 활보하는 은희의 모습이 그리 친숙하지는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작품의 호오(好惡)를 가르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원작 소설의 팬들에게 영화 속 캐릭터·결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 역시 나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매끄러운 편. 병수 역을 맡은 설경구는 초기작을 연상케 만드는 지독하고 집요한 연기를 펼쳤고 태주 역의 김남길은 관객들을 혼란케 하는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재미를 더해준다. 설현 또한 전작 ‘강남 1970’보다 발전된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캐릭터의 한계 때문인지 기능적인 역할만 해냈다. 영화는 6일 개봉했으며 러닝타임은 118분, 상영등급은 15세 이상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