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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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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가묘(에진호르)]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수레가 멈춰 섰던 오르도스 지역에 매장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장례행렬이 몽골 본토에 도착했을 때 황금 시신은 없고 빈 관만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르도스 지역에 묻힌 것은 그의 유품들이고 시신은 부르칸 칼둔에 묻혔다고 보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부르칸 칼둔쪽이 설득력이 있다. 그래도 그의 후손들은 그의 시신이 머물렀던 곳을 에진호르라 부르고 그의 가묘가 만들어진 곳을 나이만 차강 게르라고 부르면서 신성시했다. 지금 그 곳은 중국 땅 내몽골 지역 안에 자리하고 있어 주로 내몽골의 몽골인들이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 직접 찾아가 본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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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가묘]
원래 칭기스칸의 가묘는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처의 다른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몽골족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가 됐다. 15세기 몽골족의 부흥을 주도했던 다얀칸이 여걸 만두하이의 지도 아래 즉위식을 올린 곳도 이곳이었다.
▶ 강과 송림 사이의 초원지대에 위치
정자처럼 보이는 세 채의 돔형 건물로 이루어진 칭기스칸의 가묘는 송림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가묘의 앞쪽으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일부분은 노란 들꽃들로 채워져 있었다.
가묘의 뒤쪽은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우거진 구릉을 이루고 있었고 그 구릉을 내려가면 초원 지대가 다시 펼쳐지다가 이곳을 지나는 강과 만나고 있었다. 강과 송림 사이의 초원 지대는 목초지로 수백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 칭기스칸이 남긴 유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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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유품]
칭기스칸의 가묘 안 중앙에는 세 채의 게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것이 칭기스칸과 그의 부인 부르테를 모셔 놓은 사당이었고 그 양쪽 옆에 있는 게르 사당은 칭기스칸 후궁들의 영혼을 모셔 놓은 곳이었다. 또 세 채의 가묘 가운데 동쪽에 있는 가묘는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와 그 부인의 영혼을 모신 곳이었다.
▶ 벽화로 새긴 몽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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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가묘 벽화]
몽골 위구르문자의 창제와 쿠빌라이의 즉위 등, 의미 있는 사건들을 담은 벽화들도 있었다. 이 그림들은 중국풍이나 몽골 풍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색채가 강했다. 본 채 건물의 중앙에 돌로 깎아 만든 칭기스칸의 앉아 있는 좌상과 바깥에 말을 타고 있는 동상, 그리고 본 채 뒤편에 새워져 있는 거대한 비석 등이 칭기스칸의 용맹성과 지도력을 찬양하고 있었다.
중국 땅에 남아 있는 다른 몽골의 유적지가 대부분 폐허로 변해 방치되고 있는데 비해 이곳은 나은 편이었다.
▶ 일 년에 여러 차례 제사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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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보 참배하는 몽골인]
각 경우에 따라 받쳐지는 제물 등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살아 있는 양을 직접 잡아 제물로 바치거나 삶은 양고기를 바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마유주를 하늘에 뿌린 뒤 제사상에 올리고 하닥이라고 부르는 흰색, 푸른색 천을 올려놓기도 한다. 제사를 올리는 것을 포함한 이곳의 모든 행사는 이제 관광 상품으로 개발돼 때를 맞춰 관광객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 그의 유산을 되짚어봐야 할 시점
하나의 점에서 시작해 세상을 뒤흔들었던 칭기스칸은 다시 하나의 점으로 돌아갔다. 그는 평생 가슴에 품어 왔던 텡그리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 점의 흔적을 누구에게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의 시신이 잠시 머물렀던 에진호르에 그의 후손들이 손때 묻은 그의 유품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 놓은 것도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아쉬움에 대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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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초원의 석양]
육신조차 남기기를 거부했던 칭기스칸! 그러나 그는 그 육신의 몇 백 배, 몇 천 배의 많은 것들을 남겨 놓았다. 그가 세계를 품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많은 것들, 그 많은 것들은 후손들에게 갈 길을 제시해 줬고 또 보다 넓은 세계를 감싸 안아 대몽골제국을 완성하도록 만들어 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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