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스승
스승은 나를 매일 수련시키는 선생이다. 나의 결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내안에 존재하는 장점을 훈련시키는 조련사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스승을 만나는 것을 행운이다. 그러나, 배우는 학생이 인내가 없고 인성이 부족하면, 그를 스승으로 모시지 못한다. 때로는 좋은 책이 스승이 되기도 한다. 그 책을 항상 들고 다니며, 그 안에 담긴 무궁무진한 의미를 고고학자처럼 캐내어,삶의 지침으로 삼기도 한다. 최근에 내가 발견한 스승은 ‘요가수트라’라는 책이다. 기원전 2세기 파탄잘리라는 수행자가 이전부터 내려온 요가에 대한 수련서를 모두 4장 194절로 집대성한 경전이다.
2. 요가 행위
‘요가’는 기원전 12세기경 인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아리안들이 야생마野生馬를 훈련시켜 준마駿馬로 훈련하기 위한 교본이다. ‘요가’는 원래 ‘고삐’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고삐를 찬 말은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전차와 그것을 모는 전사와 하나가 되어 전쟁터에 나선다. 인간에게 ‘요가’란 자신의 욕심으로 만드어진 생각, 말, 행동을 묵상하여 최선의 자신이 되길 위한 수련이다. ‘요가수트라’의 두 번째 책은 생각, 말, 행위를 일치시켜 승화된 자신을 만들려는 ‘수련’에 관한 내용이다. 수련은 새롭고 충격적이며, 열망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습관을 강제적으로 버리려는 연습에서 시작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2권의 첫 문장에서 요가의 핵심을 고대 인도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다음과 설명한다. “타파 스바드야야-이스바라프라니다나 크리야-요가”. 이 문장을 번역하지면, “요가를 수련한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신을 깊이 응시하며, 자신이 정한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의 설명을 간단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뜻은,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에겐 다양한 의미를 선사한다.
3. 자신에게 엄격한 행위, ‘타파스’tapas
요가 수련의 첫 관문은 다음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嚴格한가?” “혹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스승이 되어 훈련하고 있는가?” 파탄잘리는 요가 행위의 첫 번쩨 관문을 산스크리트어로 ‘타파스’tapas라고 말한다. ‘타파스’는 ‘탑’tap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그 기본 의미가 “불태우다; 빛나다”이다. 타파스는 자신이 극복해야할 과거의 자신을 불태우고 매일 매일 수련을 통해 인내하는 과정이다. 타파스는 또한 새가 알에서 깨나기 위해 어미가 알을 품어 따뜻하게 만들고 때로는 알을 이리저리 굴려 조화롭게 만드는 과정이다. 타파스 수련을 위해서는 자신을 훈련시킬 어머니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알’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도태하여 죽고 만다. 타파스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이기도 하다.
나는 타파스를 ‘엄격’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이란 순간에 몰입하여 더 나은 자기 자신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거룩한 일과日課로 만들어야한다. 자신이 고안하여 만든 거룩한 일과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가 ‘엄격’이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관객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열망하는, 자신에게 감동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매일 매일 수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에 몰입한다. 한 피아니스트는 말했다. “삼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며 비평가가 알고,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며 자신이 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사람은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유일한 경쟁자는 자신일 뿐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머리맡에 놓은 자명종 시계가 오전 다섯 시면 울린다. 밖은 아직 캄캄하고 침대는 나를 붙잡는다. 매일 매일 하루만 예외로 두고 좀 더 자면 어떨까하고 내 자신을 유혹한다. “타파스”는 나를 깨운다. 약속은 자신과 하는 것이며 수련은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실천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하루가 영겁永劫이며 영겁은 잠자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나는 순간瞬間이다.
4. 자신만을 지금 깊이 응시하는 행위, ‘스바드야야’svadhyaya
요가의 두 번째 관문은 다음 질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깊이 본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심오한 자신을 오랫동안 응시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눈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을 보는 이유는, 그 대상 안에 존재하는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 대상을 온전하게 그 대상의 입장에서 보는 엑스타시의 행위는 ‘관찰’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가지지 못하면, 관찰을 통해 나쁜 습관을 얻는다. 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은 자신이 하루를 기준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것이다.” 자신이 핸드폰 안에 게임에 하루 종일을 소일한다면, 그는 ‘게임’이다. 혹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TV프로그램에 넋이 빠져 본다면, 그는 ‘바보상자’다. 공부의 대상은 자신 일 수밖에 없다.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말한다. 일정한 교육을 받고 자신을 돌아다보는 시점이 오면 “누구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무식無識이며 누구를 흉내 낸다는 것은 자살自殺이다.”
파탄잘리는 두 번째 요가 행위로 ‘심오한 자기 응시’를 말한다.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옮기자면 ‘스바다야야’다. ‘스바드야야’는 ‘자기 자신’을 의미는 ‘스바’와 ‘공부; 묵상’을 의미하는 ‘드야야’의 합성어다. 그러므로 ‘스바드야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응시; 자기 영혼에 대한 묵상’이다. 자신을 공부하고, 자신에 대해 묵상하기 때문에 사려가 깊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한다. ‘스바드야야’에는 우리가 깊이 응시할 대상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내 자신”이다. 공부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내 안으로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있지만 나도 알지 못하는 위대함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다. 현자는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그 지식이 기초가 되어, 세상도 타인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 안에 단단한 껍질에 둘러 쌓여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신’을 들춰내는 행위가 묵상이다. 우리가 그런 자신을 응시하길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여 그런 자신을 자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존재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3세기 자신을 찾기 위해 중동에 위치한 험한 시내 산에서 40년간 지낸 모세가 마침내 신을 만나 이름을 묻는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은 대답한다. “나는 내 자신이다.” 요가행위는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더 위대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요가 수련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한다.
‘심오한 자기 응시’는 지금과 여기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행위는 바로 이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을 선명하게 보고, 그 생각을 발생시키는 또 다른 나를 보는 연습이다. 또한 내 숨이 몸 안에서 출발하여 목과 코를 통해 우주로 빠져나가는 순간을 포착하고, 눈꺼풀이 깜빡이는 과정을 느린 속도로 인식하는 연습이다. ‘스바드야야’는 내가 열망하는 나를 위한 수련은 바로 여기,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다는 간절한 마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 나는 내가 할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가릴 수 있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않는 하루는 나에게 무의미하다.
네루와 간디. 1942년
5. 자신이 정한 목표를 위해 최선 다하기, ‘이스바라-프라니다나’isvara-pranidana
요가 수련의 세 번째 관문은 다음 질문이다. “당신은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것이 존재한다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내가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내가 정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과정이 목적지고, 목적지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이스바라-프라니다나’isvara-pranidana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있다. 첫 요소인 ‘이스바라’는 ‘최선의 주인; 복의 주인’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후에 종교와 철학적인 개념어로 사용되어 ‘신’, ‘진정한 자아’ 혹은 ‘불변의 현실’로도 번역된다. 이스바라는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나를 자극하고 가르치는 안내자‘다. 두 번째 요소인 ‘프라나다나’는 ‘몰입; 집중; 헌신’이란 의미다. ‘이스바라-프라다나’는 ‘나의 정성을 바쳐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행위’다. ‘자신이 정한 목표’이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집중할 수 있다. 수련하는 사람에겐 이 순간의 나의 행위가 목적지고, 목적지는 이 순간 행위에서 완성된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이 수련 중에 있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아르주나여! 너는 너의 노력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행동해야한다.” 당신은 수련 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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