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는 이제훈을 향한 팬들 그리고 대중의 신뢰를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품이 될 것이다. 코미디의 외피를 입은 작품이지만 그 안에 깃든 메시지는 여느 작품 못지않게 묵직하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재미죠. 장르로서 쾌감을 줄 수 있느냐, 남에게 추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과 영화 얘길 하며 뭔가 남는 작품이 있더라고요. 전작 ‘박열’로 배운 게 있었고 그 영향이 ‘아이 캔 스피크’의 선택까지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원칙주의자인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는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 도깨비 할머니 옥분(나문희 분)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하지만 그는 옥분의 민원이 시장 상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또 과거 끔찍한 일을 겪으며 홀로 외롭게 지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꼭 할 말이 있다”는 옥분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게 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우회적이지만 작품이 가지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꽤나 직접적이다. 이제훈의 전작 ‘박열’과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같은 의미에서 연장 선상에 높여있다고 볼 수 있다.
“매번 메시지를 주는 작품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배우니까 보여드릴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의의가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장 관객을 만났을 때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재평가되는 작품이라면 제게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죠. 그런 시각들로 작품 선택할 때 확장되는 것 같아요.”
이제훈의 조율(調律)은 성공적이었다. 웃음과 감동, 메시지까지 꽉 잡은 ‘아이 캔 스피크’는 언론시사회 직후 이례적으로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주연배우인 나문희, 이제훈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듯하고 뭉클했던 그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를 보고 난 직후 소감을 물었다.
“끝나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나문희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나오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평가하는 요소들이 많잖아요. 연기라든가 연출 스타일, 톤 앤 매너 같은 것들. 그런 요소요소를 평가하려는 자세로 보다 보니까 어떤 점이 부족한지 찾게 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어요.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진정성을 관통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에 출연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었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후반부 옥분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며 더욱 관객들을 뭉클하게 만든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옥분을 통해 그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저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인지 모르고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어요. 초중반에는 옥분과 티격태격하고, 중반부터는 영어를 통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아, 옥분과 동생이 만나는 감동적 이야기일 거다’하고 짐작했었죠. 그런데 후반에 옥분의 사연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책을 덮는 순간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그분들에 대한 예의, 그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점이 들었죠. 그런데 공동제작에 명필름에 계셨기 때문에 ‘내가 진심을 가지고 연기하면 왜곡하거나 상업영화로서 자극적으로 어필하지 않겠구나’하는 믿음이 들었어요. 그 용기로 시작하게 됐죠.”
영화 안팎으로 진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제훈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아이 캔 스피크’의 제작진과 출연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촬영을 앞두고 특별한 손님을 초대, 함께 고사를 치르기도 했다. 바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었다.
“고사 때 할머니들께서 오셨어요. 그때, 작품에 대한 마음과 잘 전달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사실 부끄럽게도 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딱 교과서 정도, 사회적 이슈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작품을 하면서 ‘만약 나와 가까운 사람 중 그런 분이 계셨다면? 그분이 나의 할머니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해결되지 못한 숙제를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본분이죠. 그런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서 남겨진 분들에게 우리가 많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연기적으로는 어땠을까? 대선배 나문희와 케미스트리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 이제훈은 “나문희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선생님과 연기할 때 어떤 연기적 표현 방법을 써야 하나 고민을 했어요. 영화의 초반부, 후반부의 톤이 다르니까요. 그런데 대본 리딩을 하는 순간, ‘뭘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선생님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듣기만 해도 제 안에서 감정이 충만해지는 거예요. 진정하고 진실된 감정 교감이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만족스럽고요. 따듯한 사람들의 마음씨가 느껴지니까 현장 갈 때도 놀러 간다는 느낌이 들고, 하나씩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아서 기대가 컸어요.”
대선배 나문희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엄청났다.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것이 꿈만 같은 듯, 내내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선생님’에 대한 애정을 쏟아냈다.
“선생님께서 영어가 상당이 익숙하시더라고요! 여쭤봤더니 성우로 연기를 시작하셔서 외화 더빙도 많이 하시고 또 남편분께서 영문학과 교수님이셔서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옥분이 하는 영어가 촌스럽고 서툴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선생님을 볼수록 ‘옥분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왔고 그 시간도 길었으니, 선생님의 연기가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선생님의 영어를 많이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요. 크게 필요하지 않으시더라고요. 하하하.”
한 번 물꼬를 튼 칭찬은 좀체 멈출 수 없었다. 연륜 있는 대선배와 연기 호흡을 맞춘 것은 ‘탐정 홍길동’ 박근형 이후 처음이라며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박근형 선생님과 나문희 선생님은 에너지가 넘치세요. 저도 나이가 들면 두 분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훌륭한 길잡이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분들 같이 영향을 주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훈에게 ‘아이 캔 스피크’는 영화 안팎으로 많은 의미를 담은 작품이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작품인 셈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이 캔 스피크’가 어떤 결과를 이뤄냈으면 좋겠냐”고 묻자, 그는 오래 고민해온 문제인 것처럼 단박에 입을 열었다.
“일본의 기성세대 또 젊은이들이 위안부에 대한 문제, 피해자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를 바라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배움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 영화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이 작품으로 인해 마음으로 동요돼 진심 어린 관심을 가지길 바라요. 여타 위안부 소재 영화들이 정공법으로 아픔을 보여줬다면 우리는 우회적으로 풀어나가기 때문에 편안하게 많은 분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깊은 울림과 메시지를 주지 않을까요? 그런 기대가 있어요.”
도무지 망설임이 없었다. 전작 ‘박열’을 지나, ‘아이 캔 스피크’에 이르기까지 이제훈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선택과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올바른 역사관 혹은 신념에도 자연스레 뒤따르는 “일본 팬에 대한 우려는 없느냐”는 이야기는 씁쓸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일본 팬들 때문에 걱정되지 않느냐고 많이 물어보세요. 하지만 저는 첫 번째로 대한민국의 배우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런 부분이 고려해야 할 사항인가? 그런 생각도 들죠.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 동참하고 또 알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요. 예전에 차인표 선배님께서 ‘007시리즈’ 북한군으로 캐스팅 제의를 받았는데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 자긍심을 가지신 일이잖아요? 저 역시도 자긍심을 가질 일을 해온 거죠.”
이제훈은 영화를 찍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꾸준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할머니들과 영화를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놓고 가셨거든요. 그 소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 게 영향력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할 수 있다면 봉사활동, 홍보대사를 하면서 많은 분이 알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