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가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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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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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의 酒食雜記

         [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가을의 편지

박종권 칼럼니스트

가을은 눈으로 온다. 짙푸르게 빛나던 장미 이파리가 문득 사위면서 계절이 바뀐다. 신록은 이미 추억이다. 여린 혀 끝으로 봄을 핥던 새순은 묵직한 녹음을 둘렀다. 그렇다. 청춘은 푸르름으로 빛나고,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붉은 입술의 꽃잎은 아름답지만, 어디 열흘 붉을까. 꽃잎 진 자리에 열매가 돋는다. 코스모스가 파란 하늘을 덮고, 고추잠자리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가을은 코로 온다. 때론 상큼하고, 때론 구수하며, 때론 아픈 향기가 바람에 일렁인다. 붉다 못해 검붉은 맨드라미는 알지 못할 향을 내뿜는다. 부끄러운 듯이, 누군가 유혹할 마음이 없었다는 듯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한 송이 국화는 소쩍새와 천둥의 눈물로 촉촉한 내음이다.
겨울과 봄과 여름을 지낸 청국장은 인생의 냄새를 풀어놓는다. 알지 못할,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조금은 정에 찌든 거부할 수 없는 향이다. 어쩌면 봄과 여름이 뒤섞인 향기일까. 태초부터 이어온 미생물의 면면한 온정일까.
가을은 입으로 온다. 누런 들녘은 지난여름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을 준비하고 있다. 알알이 찰진 밥은 엉키고 짓눌리며 혀 위를 맴돈다. 파, 마늘, 고추에 방금 담근 깍두기는 나에게 묻는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사과는 사과대로, 밤은 밤대로 묻는다. 배가 고프냐, 마음이 고프냐.
가을은 목덜미로 온다. 선득 찬바람이 스치면, 푸르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는 신호다. 옷깃을 여미면서 마음을 추스른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했지만, 끝은 또 다른 시작일 터이다. 더는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도, 알아서 뿌려주던 비도 없다. 곧 지친 몸을 낙엽으로 덮어야 할지 모른다.
가을은 귀로 온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울음이 잦아들면 머지않아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다. 고향 찾는 철새들의 합창은 불안한 듯 들떠 있다. 드디어 돌아간다. 미지의, 그러나 예정된 과정이다.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하지만 대숲에 부는 바람은, 낙엽 진 가로수에 이는 바람은 마치 채찍 같은 소리고 귓전을 파고든다. 너는 지난봄에 무슨 씨앗을 뿌렸는가, 지난여름에는 얼마나 땀을 흘렸는가. 회초리가 폐부를 엔다. 그래서 가을은 먹먹한 가슴으로 온다.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에게도 가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함이다. 시 ‘가을의 노래’에서 “바이올린의 기나긴 흐느낌이 내 가슴 엔다”고 했다. 헐벗은 나뭇가지에 이는 차단한 바람소리를 상징화했을 터이다. 그래서 “시종(時鐘)이 울리면 지난날을 회상하곤 눈물 짓는다”고 했다.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나던 잔인한 4월, 온갖 꽃을 피우며 향기가 진동하던 오뉴월, 녹음방초가 꽃보다 빛나던 여름, 어느덧 떨어진 열매 위로 낙엽이 쌓이는 가을이다. 누군들 회한이 없겠나. 그래도 어쩌랴. 새 생명을 품은 열매는 ‘존재의 이유’이기에 모진 바람에도 이리저리 낙엽으로 구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파한 석가모니는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했다.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끼는 모두가 공허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비록 찰나의 행복일지라도 ‘가을’을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면 영겁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죽어서 영혼이 된 패트릭 스웨이지의 간절한 소망은 연인인 데미 무어를 ‘터치’하는 것이었다. 한번 만져볼 수 있다면, 한번 껴안을 수 있다면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가을에 편지를 쓰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를 향해 가는 생명, 그 본원적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말이다. 이 안타까움을 벗어나면 바로 득도(得道)의 경지이다. 시인 고은은 ‘가을 편지’에서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고 되뇐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라며.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답고,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답다며.
시의 정점은 낙엽이 떨어지고 흩어진 후 아예 ‘사라진 날’이다. 외로운 여자도, 헤매는 여자도 아닌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한다. 도(道)를 구하려 홀로 정진하다, 깨달음의 문턱에서 헤매다, 드디어 그 문턱을 넘어 염화시중 미소의 아름다움을 봤다는, 하나의 게송(偈頌) 같다.
그렇다. 가을은 편지의 계절이다. 수취인이 있든 없든, 우표를 붙였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하지만, 시인도 사랑에 빠지면 편지를 쓴다.
청마 유치환이 그랬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가 신록의 오월에만 편지를 쓰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만 5000여 통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푸르름이 바랜 가을일지라도, 그에게 하늘은 여전히 빛나는 녹색일 터이다. 사랑은 생명의 원천이고, 언제나 푸르니까 말이다.
가을의 문턱이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햇살은 따스하며, 사랑은 지척에 있다. 늦기 전에 사랑할 일이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더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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