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羨望)과 시기(猜忌)
1. ‘나 자신’.
아침에 일어나면 좌정한 후, 나는 내 마음속 깊이 안주하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질문한다. 이 질문(質問)은 어제를 버리고 오늘을 시작하는 첫 관문(關門)이며 오늘을 나에게 감동적으로 살기 위한 결심이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열망하는 ‘나-자신’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이란 시간이 어김 없이 흘러가, 밤이 되면, 나는 ‘좀 더 나은 나-자신’이 되어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의식적으로 수련했는가? 어제의 나를 유기하고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해 용감하게 행동했는가?” 일상은 소용돌이다. 정신은 차리지 않고는 금방 가버린다. 137억년 빅뱅에서 지금까지가 순간이듯이, 내 자신을 가지런히 정비하지 않으면, 나는 세월의 야속함을 후회할 것이다. 오늘도 나하고는 상관 없는 복잡한 일들이 나를 그 소용돌이 안으로 잡아당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는, 그 거센 움직임보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바로 ‘나-자신’이란 커다란 바위다. ‘나-자신’이란 나와 내가 열망하는 자신이 일치된 경지다.
2. ‘아바스타나’
IT가 가져다준 편리함은 우리를 더욱 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훔쳐보고 탐닉하고 부러워하게 만든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여 우리-자신을 잃어버린다.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문구와 이미지는 우리가 거주해야 할 ‘아바스타나’를 파괴하고, ‘나-자신이 아닌 것’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선진 개인은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선진 사회와 선진 국가는 그런 개인들의 집합이다. 후진 개인은 시선을 남에게 고정하여 부러워하거나 시기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저지른 잘못을 찾는다. 후진 사회와 후진 국가는 그런 개인의 합이다.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개인의 시선은 타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이 시선은 대개 두 가지 불필요하고 파괴적인 감정을 초래한다. 선망(羨望)과 시기(猜忌)다.
3. 선망(羨望)
부러움은 고유한 자신을 남들과 비교함으로써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만의 특별한 자신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고, 남들이 가진 어떤 것을 부러워하게 만든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부러움을 라틴어로 ‘인비디아’(invidia)라고 불렀다. 로마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로 돌아올 때, 전차에 남성 성기모양의 인형인 ‘파키누스’(fascinus)를 달았다. 로마 장군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선망의 눈길을 주술적으로 방지하겠다는 부적이다. 이 ‘선망의 눈길’이 바로 ‘인비디아’다. ‘부러움’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엔비’(envy)가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했다. ‘인비디아’는 ‘어떤 대상을 넋을 놓고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 ‘인비데레’(invidere)에서 파생했다. ‘인비데레’는 ‘보다’를 의미하는 ‘비데레’와 ‘-앞으로 깊이 들어가’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사 ‘인’의 합성어다. ‘인비디아’는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부, 권력 혹은 명예를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한자로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선망’(羨望)이라고 부른다. 부러워할 ‘선’(羨)자는 다른 사람이 가진 ‘양’(羊)을 보고 탐내며 그것을 소유하여 먹고 싶어 저절로 입 밖으로 ‘침’(㳄)이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선망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에서 ‘고통’으로 설명한다. ‘선망’이 어느 순간에 단순히 부러움의 대상을 넘어, 자신의 고통으로 진화한다. 우리가 스스로 행운과 안녕의 기준으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진 행운과 안녕이 우리의 기준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선망은 불행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선망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기를 원하는 나쁜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한다. 그 선망이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자신이 최선을 찾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시기(猜忌)하는 발판이 된다.
4. 시기(猜忌)
선망의 상태가 한 동안 방치되면, 선망은 ‘시기’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자리잡는다. 시기는 다시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 실패, 그리고 창피함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괴물 같은 감정으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정을 ‘에피카이레카코스’(epikhairekakos)라고 불렀다. 이 감정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부른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샤덴프로이데를 인간의 감정들 중에서 가장 악한 것으로 지목했다. 그는 말한다. “부러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남들의 불행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악마적이다”라고 말했다. 부러움을 통제하지 못하면, 시기가 되고, 시기를 숙성하면 샤덴프로이데가 된다.
샤덴프로이데는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살인사건에 등장한다. ‘창세기’ 4장엔 인류가 처음으로 농사와 양치기를 한 기록이 등장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는 카인과 아벨 형제를 두었다. 카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성서 저자는 인류문명과 문화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 이런 식으로 기원을 설명하였다.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가 되어, 카인은 자신이 농사를 통해 수확한 곡식을 바쳤고, 아벨은 양 한 마리를 바쳤다. 성서 기록에 의하면, 카인이 몹시 화가 나 얼굴색이 변했다고 전한다. 카인은 아벨과 비교하여 자신의 제물이 하찮아 보였고, 스스로 신이 자신의 제물을 싫어한다고 추측하였다. 카인은 자신에게 몰입하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을 훔쳐보고, 자신을 동생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울증에 빠진다.
카인은 아벨을 선망의 눈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시기하기 시작한다. 카인은 급기야 아벨을 살인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그를 살해한다. 성서에 등장한 최초의 살인사건은 샤덴프로이데라는 악마적인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5. ‘선망의 대상’
자신을 지속적이며 섬세하게 관찰하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외부를 향한다. 소크라테스, 붓다, 예수, 어거스틴, 단테,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베토벤, 모차르트, 니체, 아인슈타인,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위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연에서 흘러나오는 위대한 자신을 위한 ‘내면의 소리’를 감지하고, 그것에 몰입하여 반응한 자들이다.
내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것은 ‘미래의 나’이지 남들이 생각하는 ‘나’가 아니다. 이 원칙은 실제의 삶과 지적인 삶에서 실천하기 힘드나,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분명한 기준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조언하는 수많은 스승들에 둘러싸여 있다. 위대한 나-자신을 구가하는 사람은 우리를 유혹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완벽한 상냥함과 내적인 고독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누구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의 시기-질투의 대상은 오늘 저녁에 완성될 ‘더 위대한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림
‘아벨을 죽이는 카인’ (1610)
이탈리아 화가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
소장: 오스트리아 비엔나 예술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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