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후계자 선택-오고타이
[사진 = 몽골 기마부대]
대칸 칭기스칸이 텡그리(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제국안의 최고의 관심사는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셋째아들 오고타이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오고타이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무려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오고타이는 어떻게 후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 쿠릴타이서 대칸 선출
대부분의 정주민사회는 집안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큰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보편화돼 왔다. 가능하면 큰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 하는 의식은 지금도 상당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몽골의 유목민 사회는 애초부터 그러한 의식이 상대적으로 희박했다.
[사진 = 유목민 말손질]
초원의 유목민들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지도자의 능력이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그들이 집단화 됐을 때 조직 또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를 뽑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쿠릴타이라는 관행이다.
▶ 가계는 막내상속 관습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가계를 막내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있다. 막내에게 가계를 물려주는 전통은 가문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막내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남아서 가문을 번창시키라는 주문이 담겨져 있다. 또한 어린 막내를 마지막까지 보살피고 배려하려는 부모의 뜻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진 = 게르 안의 소년들]
가계를 물려준다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의 가축과 집안의 화로를 물려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화로의 불씨(골롬타)는 가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살려두어야 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긴다. 이 불씨가 꺼지면 가문이 기운다고 생각하고 화로를 항상 게르(이동천막)의 중앙에 놓아 둔 뒤 다른 모든 물건은 화로를 기준으로 배치한다.
▶ 아버지의 후처 막내가 맡는 특이한 관습
[사진 = 검은 토크기]
막내는 이 화로를 물려받아 가문을 지켜 나가야 한다.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후처까지 떠맡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가 죽으며 수혼제에 따라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 즉 숙부의 부인이 돼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인 동시에 숙모가 되지만 후처들은 아들이 맡아야 하는 특이한 관습이 그 것이다. 형사취수의 관습은 부여와 고구려 등 우리의 역사에서도 보이고 성서에도 나타나고 있어 동서양 어느 곳에서나 인정받는 관습 이었다.
[사진 = 왕소군 석상]
하지만 의붓어머니를 자신의 처로 삼는 일은 드물었고 유교적 전통에서 보면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친족에 의한 혈족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몽골인들은 이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흉노 시절 왕소군의 예도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아버지의 후처 가운데는 나이가 어린 경우도 많아 막내가 오랫동안 보살피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도이고 나중에 죽은 뒤 하늘나라로 가더라도 아버지에게 오히려 칭찬 받을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 선택된 인물은 오고타이
[사진 = 오고타이 추정도]
아무튼 이러한 몽골의 상속자 선정의 전통과 관습의 측면에서 보면 칭기스칸이 죽은 뒤 네 아들 가운데 후계자의 자리에 가장 접근해 있었던 아들은 막내 툴루이였다. 실제로 칭기스칸은 원정 중에 툴루이를 항상 데리고 다닐 정도로 막내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보르지긴 씨족의 가문을 이어갈 적임자로도 인정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화로(火爐) 즉 골롬타의 수호자였던 툴루이에게 칭기스칸은 당시의 몽골군사 12만 9천명 가운데 10만 천명과 함께 몽골족의 근거지인 오논강과 케룰렌강 그리고 툴강 유역지역을 물려줬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가산의 상속과 제국을 다스릴 후계자를 선정하는 일은 별개의 사안으로 여겼다.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당시 시대 상황에 맞는 인물에게 제국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셋째 오고타이였다. 서하 원정 중에 숨진 칭기스칸은 이미 후계자로 지명해 둔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다음 대칸으로 삼을 것을 재차 확인하고 숨을 거두었다. 칭기스칸이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네 아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후계자 대열에서 비켜난 주치
[사진 = 주치 추정도]
큰아들 주치는 애초부터 후계대열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는 ‘메르키드 콤플렉스’라는 이른바 핏줄에 대한 시비에 염증을 느끼고 러시아 의 킵차크 초원지대에 은둔해 있다가 칭기스칸 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었다.
▶ 엄격하고 고리타분한 차가타이
[사진 = 차가타이 추정도]
둘째 아들 차가타이도 대권을 장악해 나갈 인물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우선 주치와 끊임없이 핏줄시비로 불화를 야기했던 둘째 차가다이가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차가타이는 남에게 엄격하고 무서운 데다 성격도 고리타분해서 신망을 얻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본인 스스로도 애써 제위를 탐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오고타이와 가까웠던 그는 오고타이가 대권을 장악하는 데 이의가 없었다. 야율초재의 권유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동생 앞에 무릎을 꿇은 것만 봐도 자신에게 부여된 영토를 통치하며 지내는 데 만족해 한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 잔인하고 인색한 툴루이
[사진 = 툴루이 추정도]
가계의 상속자인 막내 툴루이는 정복을 꿈꾸는 대담하고 훌륭한 장수였다. 그런데 약점이 있었다. 그 것은 칭기스칸이 지적한대로 잔인한데다 인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비해 셋째 오고타이는 네 명의 아들 가운데서는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아버지와 같은 천재성이나 권력 지배에 대한 열정은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전사도 아니었고 의지력이 부족한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아버지로부터 자주 꾸중을 듣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다. 바로 이점이 대권을 잡을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 화합의 시대에 적합한 인물 선택
칭기스칸은 다음에 올 시대는 정복의 시대가 아니라 화합의 통치시대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자신이 이룩한 제국을 제대로 유지 확대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힘보다는 지혜가 필요하고 엄격한 처벌보다는 관용과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 석양의 고비사막]
이를 위해서는 지적이고 온화한 성격을 지닌 관리자가 다음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 정당한 수순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런 면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오고타이였다. 형인 주치의 대권 장악을 반대하고 나섰던 둘째 차가다이는 자신이 대권을 노릴 수도 없었다.
[사진 = 초원의 여름]
그렇다고 자신만만하고 야심이 있는 막내 툴루이에게 대권이 넘어갈 경우 자신의 입지가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툴루이의 후계지명을 적극 저지했다. 대신 자신과 사이가 좋고 얌전한 오고타이를 밀었다. 칭기스칸의 선택에다 네 형제간의 미묘한 관계가 말하자면 오고타이의 대칸 즉위라는 차선의 해답을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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