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침잠의 세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바닷길이 중요했던 근대 시기로 접어들면서, 인천은 다시금 한반도 관문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인천은 수도 서울의 문호, 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성 등의 요인으로 인해 대외무역의 중심지, 세계문화의 한반도 발신지 그리고 다양한 인종과 열강들의 각축장이 돼 갔다.
당시 청나라가 부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에 자신들의 첫 조계지를 설치하고자 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인천 제물포에는 이미 상당수의 청국상인들이 거주하며 경제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향후에도 이곳에서의 상무(商務)가 지속적으로 흥할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84년 4월 청나라는 조선과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함과 동시에 인천에 중국인마을 곧 청국전관조계(淸國專管租界)를 설치하게 됐다.
조선 정부는 장정 체결에 따라 조계지 일대에 평탄작업, 터파기, 하수도 및 도로공사 등 기반시설에 대한 건설을 마무리하고 경매방식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토지를 불하했다.
당시 일본조계 서쪽, 지금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에 설정된 청국조계의 토지는 바다에서 근접한 곳부터 차례로 1등지, 2등지, 3등지로 구분됐는데 토지를 얻은 화교들은 이곳에 주택과 상점을 짓고 본격적인 생업의 길로 들어섰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면서, 조선과 청나라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은 폐기됐다. 청국조계의 법적지위도 모호해졌다.
이후, 지위미정의 상태로 유지됐던 청국조계는 결국 1914년 조선 내 모든 조계를 철폐한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의거해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본인들이 점유하고 있던 토지와 가옥에 대한 소유권 내지 영구임대권이 인정돼 계속 거주할 수가 있었다.
조계가 철폐되면서 이곳의 행정명칭은 인천부(仁川府) 시나마치(支那町)로 정해졌다. 인천의 화교들은 ‘시나(支那)’란 명칭이 중국의 국체를 비하하는 것이라며 수차례 정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의 인천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야요이쵸(彌生町)로 바꿔 부르기까지 했다.
이에 화교들은 일본식 명칭을 모두 거부하고 자체적으로 ‘중국가(中國街)’로 명명해 불렀다. 중국 동네 혹은 중국인 마을이란 뜻이다. 지금의 선린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 후로도 한참 뒤인 1946년이다.
몇 해 전부터 인천대 중국학술원은 인천화교협회 소장 자료에 대한 전수조사와 디지털아카이빙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업 중에 청국조계 내 옛 거리에 대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게 됐다.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거리를 중국식으로 명명하는 관행이 있었다. 인천의 중국인 거류지에 거주하는 화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러한 거리명은 행정상의 정식명칭은 아니었고, 화교사회 내에서만 통용되던 것이었다.
당시 인천의 청국조계 즉, 중국가에는 여섯 개의 큰길이 있었다. 중국인거류지를 종단하는 췌화가(萃華街), 영화가(永華街), 계후가(界後街) 그리고 이 세 개의 대로에서 횡으로 갈라져 나온 동횡가(東橫街), 서횡가(西橫街), 중횡가(中橫街)가 바로 그것이다.
췌화가의 췌화(萃華)는 ‘중국인이 모여 사는 곳’ 정도로 풀이를 할 수 있다. 낯선 이국땅인 인천에서 화교들이 새로운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한데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췌화가(지금의 태림봉에서 태화원으로 이어지는 길)는 청국조계 내에서 가장 번화한 일종의 ‘메인 스트리트’였다.
췌화가를 사이에 두고 화교들이 경영하는 무역상, 포목상, 잡화상, 이발소, 양복점 등이 즐비했고 화교 대부분이 이곳에 거주했다.
영화가의 영화(永華)는 ‘중국인이여, 영원하라!’란 뜻이다. 여기에는 인천 땅에 거주하는 자신들의 번영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화교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가는 당시 인천청국영사관과 인천화교소학, 인천중화회관 등 관청과 교육기관이 들어서 있는 일종의 행정가(行政街)였다.
계후가는 말 그대로 청국조계 뒷길이란 뜻이다. 현재 삼국지벽화가 있는 인천화교학교 후문 일대로, 길이는 379.5m이다.
총 길이가 147.2m인 동횡가는 지금의 한중문화관에서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에 이르는 길이고, 서횡가는 짜장면박물관 뒷길로 북성동주민센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중횡가는 현재 인천차이나타운의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는 곳으로 중국음식점인 풍미, 대창반점 등이 위치해 있다.
선린동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의 직사각형 형태를 이뤘던 청국조계는 훗날 서쪽 일대(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부근)가 축소되는 대신 지금의 북성동 지역으로 거주지가 확장됐다. 그러면서 남북 방향의 직사각형 형태인 현재의 차이나타운으로 변모하게 된다.
인천 화교들은 새롭게 확장된 지역의 거리에도 임의로 중국식 거리명을 부여했다. 가령, 계후가와 서횡가가 만나는 지점(현재 북성동주민센터 앞) 일대는 삼파관(三波館)이라 불렀다.
의선당(義善堂) 부근은 오귀루(五鬼樓), 동횡가와 계후가가 만나는 지점(현재 전서경 주택 뒤) 일대를 조방대(吊膀臺)라 명명했다.
그런데 인천에 거주하는 화교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삼파관, 오귀루, 조방대 등의 새로운 거리는 일반적으로 화교들이 통행을 꺼려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 일대가 동네의 불량배들이나 들락거리고 아편과 마작 혹은 성매매가 주로 행해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교들에게 있어 이 지역은 봐서도 안 되고, 가서도 안 되는 일종의 기피 장소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일례로 조방대의 조방(吊膀)은 몸을 파는 여성이 치파오(旗袍) 사이로 허벅지를 드러낸 채 벽에 기대 남성을 유혹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환락가나 유흥가는 어느 도시에나 있기 마련이다.
특히 바닷길을 통한 무역업이 주로 행해졌던 청국조계는 외지인이나 객상(客商) 혹은 막노동꾼인 ‘쿠리(苦力)’
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이들에게 잠시나마 여독과 긴장을 풀 수 있는 오락문화와 위락공간은 필수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말 그대로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 화교들의 집단거주 지역을 뜻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화교들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이국적인 삶의 방식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 방문하게 된다.
인천차이나타운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천차이나타운을 다녀간 사람들 중에 화교들의 일상에서 작동되는 내부적 원리와 질서에 주목하거나 그것을 발견하는 이는 드물다.
오히려 화교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호흡이 살아 숨 쉬는 장소로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짜장면을 팔기 위한 호객행위만이 횡행하는 ‘짜장면 거리’ 정도로 기억하는 이들이 다수다.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그만큼 화교들의 정체성을 오롯이 드러내기에는 문화적 인프라나 콘텐츠 면에서 여전히 아쉽고 부족한 측면들을 내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올해 인천대 중국학술원에서는 이 청국조계의 옛 거리와 현재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한 눈에 대비해 볼 수 있는 증강현실(AR) 프로그램을 마련해 일반에 공개했다. 그
동안 인천차이나타운에는 인천의 관광산업 활성화란 명목 하에 각종 조형물이나 박물관들이 난립한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관 주도의 일방적인 개발로 이어짐에 따라 늘 난개발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박물관이나 조형물과 같은 정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ICT(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동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인천차이나타운의 원래 모습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물론 자료에 대한 고증을 통해 옛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고자 했지만, 고증이 불가능한 부분은 일부 상상력을 동원해 보완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작업이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이나타운은 단순한 관광 상품이 아니라 화교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스스로 가꿔 나갈 수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 겸 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및 화교관행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의 마주보기’(공저), ‘그래도 살아야 했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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