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과연 초토화 됐던가?
[사진 = 몽골군 러시아 정벌도(몽골 국립 박물관)]
러시아 연대기와 당시 러시아의 문학에 남겨진 몽골군의 러시아 정벌은 잔인의 극치를 이룰 정도로 철저히 파괴와 학살이 이어진 것으로 묘사돼 있다. 전쟁이란 그 것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살상과 파괴를 부산물로 남겨 놓는다. 그 정도에 따라 그 전쟁의 참혹함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러시아 측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의 러시아 정벌은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정벌이었다고 할만하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보이는 대로 파괴한 야만적인 행위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과연 러시아인들이 남긴 기록대로 몽골은 러시아의 국토와 러시아인들을 그토록 황폐화 시켰을까?
▶연대기 기록자, 공포전략에 마취됐을 가능성
[사진 = 드미트리 돈스키 출정]
여기에서 우리는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호레즘 전쟁에서 사용했던 공포전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항하는 적을 본보기로 삼아 철저히 응징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스스로 성문을 열도록 만든 공포 전략이 러시아 지역에서도 틀림없이 등장했을 것이다. 몇 곳에서는 철저한 파괴와 학살이 이루어졌겠지만 나머지 대부분 지역에서는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정벌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러시아 연대기의 작가들이 몽골군을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군대로 기록한 것은 우선 기록자 자신이 몽골의 공포전략에 마취됐을 정도로 몽골군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그 같은 전면전을 보기 어려웠던 그들로서는 전쟁의 참상, 그 것도 자신들이 피해자가 된 전쟁의 참상은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들이 당하면 엄청나게 큰 피해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수백, 수천 명이 죽더라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다른 나라들이 느끼는 심각성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이 피해자가 됐을 때는 금방 달라진다. 자신들이 당한 피해가 엄청나게 커 보여 피해를 가한 상대방에게 극한적인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비난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인들은 이전까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자신들 보다 분명히 야만스러워 보이는 몽골군에게 정복당한 불쾌감을 과장해 나타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민족 침입에 대한 러시아인의 증오와 분노를 부추기고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 몽골군이 루시를 완전 초토화시켰다는 시켰다는 주장은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면 잘못된 사실이라는 일본의 유리시아 지역학 전문가 스기야마 교토대학 교수의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
▶몽골 폭풍 후 잇단 승전의 의문점
[사진 = 노보고르드 성곽 ]
[사진 = 블라디미르.수즈달리 왕자 출정]
몽골군이 일으킨 폭풍이 러시아를 스쳐 지난 간 직후인 1240년, 노보고르드 공국의 공후 알렉산드르는 네바 강변에서 당시 최강으로 인정받던 스웨덴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어 1242년에는 막강한 독일 기사단의 침략을 블라디미르와 수즈달리 공국의 지원 아래 호수 위 얼음판의 대접전을 통해 무찔렀다.
[사진 = 노보고르드와 수즈달리 전투]
이 연이은 승전으로 그는 일약 루시 전체의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네바강에서의 전공을 기려 그에게는 네프스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진 = 바투군의 러시아 공격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인들이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소련 시절에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무공 훈장을 만들어 조국 수호에 뛰어난 공을 세운 군인에게 주기도 했다. 바로 직전에 바투의 몽골 원정군이 러시아를 황폐화시키고 지나갔다면 과연 당시 막강한 두 외국과의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만한 여력이 남아 있었을까?
[사진 = 몽골군 수즈달리 점령]
특히 몽골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황금의 고리 도시인 블라디미르와 수즈달리가 어떻게 보탤 힘이 있었겠는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존재와 그의 활동은 몽골의 침략에 의해 루시가 연대기에 언급된 것처럼 그렇게까지는 망가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도 있지만 상당수 지역은 별 전투 없이 마무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남아있는 키예프 유적
거의 모두가 죽고 도시가 파괴됐으며 2백여 채의 초라한 집만 남았다는 키예프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 같은 생각이 굳어진다. 1989년 봄, 취재를 위해 키예프를 방문한 적이 있다. 1986년 4월, 최악의 원전사고로 세계를 경악시킨 체르노빌 지역을 취재하고 루시의 발생지인 키예프의 모습을 살펴보겠다는 두 가지 목적이 방문 이유였다.
[사진 = 우스뻰스키 사원(키예프)]
키예프에 도착했을 때 잘 정돈돼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라는 첫 느낌이 다가왔다. 굳이 색깔로 비유한다면 은은한 벽돌 색과 초록빛이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내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도니에플강과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고풍스러운 사원과 유적지들, 그리고 초록 빛깔로 치장한 채 적당한 비율로 뒤섞여 있는 나무들이 평화스러운 도시라는 인상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 키예프의 상징 성소피아 사원
[사진 = 성 소피아사원(키예프)]
키예프의 영광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물은 11세기에 세워진 성소피아 사원이다. 성소피아 사원은 그 색채의 조화가 아름답다. 이 사원은 키예프가 최상의 번영을 구가하던 11세기 중반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 키예프의 공후 야로슬로프 무드로이(Мудрый:무드로이는 별명으로 ‘지혜있는’ 이라는 의미)는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틴노플의 사원을 본 따 이 사원과 도시로 들어서는 정문인 황금의 문을 건설했다. 로슬로프는 이와 함께 이때 러시아 문화의 원천으로 상징되는 뻬째르스키 수도원도 세웠다. 야로슬로프는 75살까지 키예프를 통치하다 1054년 죽은 뒤 자신이 세운 성소피아 사원에 묻혔다. 야로슬로프의 죽음 이후 키예프 루시는 좋은 땅과 좋은 도시를 차지하려는 공후들 간의 내분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몽골군의 침입을 맞게 된다.
▶훼손됐지만 남아 있는 황금의 문
[사진 = 황금의 문]
당시 세워졌던 황금의 문은 성 소피아 사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황금의 문에서 금빛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는 문의 위쪽에 금박을 부착해 황금의 문이라고 불렀으나 몽골군의 침입으로 파괴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됐고 지금은 당시에 남은 거대한 돌기둥을 살려 옛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고 동행한 러시아 언론인이 설명했다. 그러나 복원된 모습으로만 봐도 당시 장엄했던 황금의 문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 = 뻬째르스키 수도원(키예프)]
키예프를 그리이스 정교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시킨 뻬째르스키 대수도원에는 여러 개의 교회와 각종 박물관 그리고 지하묘지 등이 자리 잡고 있어 그 면적만 해도 엄청나게 넓었다. 볼 것이 많은 만큼 관광객들도 많아 가는 곳마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실제보다 과장 됐을 몽골의 파괴
[사진 = 몽골군 사용 투석기]
당시 키예프를 둘러볼 때는 몽골의 침입이라는 부분을 간과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파괴와 학살을 일삼았다는 몽골의 군대가 기록에 남겨진 것처럼 ‘남은 것이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식으로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면 그 것들이 과연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몽골군대의 ‘파괴’는 역시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키예프는 일례에 불과 하지만 다른 도시들도 상황은 비슷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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