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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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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3세기 러시아와 동유럽]
▶리그니츠 전투 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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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군 동유럽 공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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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리그니치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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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군 폴란드 점령]
▶헝가리에서의 잔혹한 징벌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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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요강 전투도]
부다와 페스트라는 두 도시까지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거의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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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유럽 기마병과 몽골 기마병]
서유럽 전체가 공포의 도가니 속에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유럽의 단결을 주장한 프레드리히(Friedrich) 2세외에는 누구도 적극적인 대응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몽골군이 진격을 멈췄다. 서유럽에게는 신의 축복이 내린 것이다.
▶오고타이 죽음과 함께 몽골군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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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 경기병]
몽골군의 주력부대가 서둘러 본토로 돌아가는 동안 바투는 헝가리 등을 유린하면서 여유 있게 볼가강변 본영지로 회군했다. 그리고 주치 울루스를 정비해 러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한순간의 악몽처럼 스쳐간 몽골군이 유럽지역에 남겨 놓은 것은 공포였다.
▶오늘날까지 남겨진 공포의 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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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 중기병]
또 몽골군의 공격 당시 상황을 흉내 낸 프로그램이 오늘날까지 축제 행사 때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몽골군의 침공은 당시 동유럽 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 공포의 잔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한 차례의 일진광풍이었는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결과는 가져오지 않았다.
▶사라진 ‘아시아 괴물’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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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말안장과 발걸이( 몽골 국립박물관)]
아마도 유럽 전체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유린 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우선 유럽이 힘으로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몽골군을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몽골의 기마군과 유럽의 기마군의 전투 방법의 차이를 감안하면 유연성이 부족한 유럽군이 바람처럼 휘젓고 다니는 몽골군을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럽 전체가 몽골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고 세계사의 물줄기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약은 항상 만약일 뿐이다. 다만 나중 뭉케 대칸의 죽음이 중동지역 정벌의 변수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칸의 죽음이 세계사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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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병사 복식(몽골 국립박물관)]
교황으로 선출된 이노센트(Innocent) 4세는 몽골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몽골을 회유하기 위해 카르피니(Carpini)를 구육의 즉위식에 보냈다. 또 프랑스의 왕 루이(Louis) 9세는 루브루크(Louvrek)를 몽골에 보내기도 했다. 이들이 몽골을 다녀와서 남긴 기행문은 유럽에게 동방에 대해 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줬다. 이때부터 적어도 아시아에 괴물이 산다는 허무맹랑한 전설은 사라졌다. 또 중국의 활판인쇄와 화약제조 기술 등이 유럽에 전해지고 동서교역이 되살아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은 전쟁이 남긴 플러스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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