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只今)
1. 불안한 시작
시작(始作)은 항상 불안하고 폭력적이다. ‘시작’이란 단어엔 이전(以前)과의 매정한 단절, 이후(以後)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확신과 집착이 혼재한다. 익숙한 것들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편함을 선물한다. 그러나 이 편함은 이중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곧 불평과 불편함으로 쉽게 변한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자신이 감동하는 최선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 열정적으로 수련하는 자만이 실망하지 않는다. 그런 최선은 항상 종말론적이다. 최선을 지향하는 지금 여기가 최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진부하게 만든 후, 소멸하게 하는 우주의 가장 강력한 괴물이다. 인간이 이 시간을 멈추게 하여 그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시간의 흐름에 이러 저리 떠다니는 부초와 다를 바가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초월하여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개척하는 예술적인 행위가 ‘시작’이다. 시작은 독창적이다. 현재라는 순간을 파괴하여 미래라는 영원한 순간으로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의지다. 로마제국 시대 서정시인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년~8년)는 이 의지를 담은 한 유명한 <송가>Odes 1.11을 남겼다. 라틴어 원전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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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위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남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이 저 만큼 도망간다.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당신의 소중한 가슴을 두지 마십시오.”
2. ‘남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
호라티우스는 위 시구에서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남을 부러워하다가 보낸 세월’과 '바로 이 순간'. ‘인비디아’(invidia)는 라틴어로 ‘부러움’이란 뜻이다. 영어 단어에 ‘부러움; 질시; 시기’란 의미를 지닌 ‘엔비’(envy)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엔비’는 처음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보며 부러워하다가, 자신이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투하게 된다. 라틴어 명사 ‘인비디아’를 분석하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유추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스스로 발굴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신이나 영혼을 돌보지 않아 시선이 주위사람을 보고 탐닉하여 바라본다. 그 상태를 내포하는 접두사가 ‘인’(in)이다. ‘인’은 라틴어에서 ‘~를 향하여 넋이 나가 탐닉하여 들어간 상태’를 의미하는 전치사다. 상대방을 쳐다보고 희열을 느끼는 행위인 ‘비디아’(vidia)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비데레’(videre)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동사 ‘인비데레’(invidere)는 ‘어떤 대상을 탐닉하며 바라보다’라는 의미다.
‘부러움’이 시간이라는 괴물을 만나 ‘질투’가 된다. 호라티우스는 그런 선형적이며 흘러가는 시간을 ‘아에타스’(aetas)란 단어를 이용하여 표현한다. ‘아에타스’는 양적인 시간으로 숫자로 표시된다. ‘아에타스’의 속성은 ‘도망’과 ‘덧없음’이다. 호라티우스는 자신의 심정을 이 시를 짓는 순간을 이용하여 표현한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시간은 어김없이 도망한다. ‘아에타스’는 ‘세월; 세대’로 흔히 번역되는데,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경우, 그런 시간은 세월이 되어, 일년, 십년 혹은 한 사람의 인생 단위로 휙 사라진다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보면 저만큼 지나가 버린 세월을 어떻게 잡을 수가 있는가?
3. “열매가 가장 잘 영글었을 그 순간”
호라티우스는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만 하다 보낸 세월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순간을 농부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이 행위를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표현한다. 이 문구는 1989년 '젊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미국 베우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의 한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존 키팅(John Keating) 역을 맡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고 그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카르데 디엠. 소년들이 이 날을 잡아라. 너희들의 삶을 비범(非凡)하게 만들어라!” 학생들이 비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카르페 디엠’을 실천해야 한다. ‘비범’엔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가 없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될 때, 등장하는 아우라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탁월하다고 추앙하는 ‘선율’에 쉽게 매료된다. 소위 전문가들이 최고라고 추켜세운 그런 평가를 그대로 믿는다. 그런 전문가들로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범이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정량화될 수 없다. 비범은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여 마음 속 깊이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별이 저 하늘의 별보다 숭고하다고 느낄 때, 비범이 생기기 시작한다. 모자를 삐뚤게 쓰거나, 걸음걸이를 힙합가수처럼 하거나, 몸에 아랍어로 쓴 문신한다고 비범하지 않다. 자신의 심연에서 빅뱅을 시도하는 자신만의 별들을 찾아 본적이 없는 범인(凡人)들이다.
비범한 자는 자신만의 춤을 추는 빛을 보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자다. 호라티우스는 그 빛을 ’디엠‘(diem)이라고 표현했다. ‘디엠’은 라틴어로 ‘낮’ 혹은 ‘하루’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인류를 오래 전부터 매료시킨 단어로 본래 의미는 ‘빛나는 물체’, ‘최초의 빛’, 혹은 ‘빛을 창조하는 존재; 신’이란 의미로 확장되었다. ‘신’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데우스’(deus)도 같은 어원에서 출발하여 ‘우주를 혼돈 속에서 질서로 전환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류는 오래 전에 빛의 상징인 태양을 숭배하였다. 태양은 암흑과 혼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물을 적소에 배치하고, 그 만물에 존재의미를 부여한다.
기원 전 6세기 한 유대인 시인이 그 빅뱅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은 만물을 존재하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인 힘이다. 호라티우스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창조적인 힘인 ‘빛’을 보았다. 이 빛은 우주의 질서에 맞추어 스스로 매순간 최적의 상태로 변화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기도 하다. 우주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예정된 시간’이 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다. 우리는 이 우주적인 시간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부르고 그 시간에 자신의 삶을 위한 최선으로 몰입하여 자신의 별을 찾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4. “그 열매를 나뭇가지로부터 강제로 떼어내십시오!”
호라티우스는 이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을 ‘카르페’(carpe)라고 표현하였다. ‘카르페’는 고대 로마 농부들이 즐겨 사용하던 단어다. 로마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취미는 ‘정원 가꾸기’였다. 로마는 그리스로부터 조원(造園)과 원예(園藝)기술을 배운다. 그리스의 알렉산더는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황제들이 가꾸어 놓은 정교한 정원, 과수원, 화원을 보고 심취하여 학문분야로 만들어 귀족들의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수련의 장으로 만들었다. 조원과 원예 기술의 핵심은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다. 일 년 중 언제 비가 오고 눈이 오는지. 언제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지, 언제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언제 추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카르페’는 과실 농사를 지으면서, 과실의 당도가 가장 높고 맛이 있을 때, 과실이 달려 있는 나무로부터 과실을 강제로 따는 행위다. 농부가 이 순간을 놓친다면, 그 과실은 땅에 떨어져 먹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일년 동안 쏟은 정성이 쉽게 헛수고가 된다. 감나무 농사로 예를 들어보자. 농부는 감나무 묘목을 심기 위해서는 적당한 기후조건, 강우량, 일조량,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당도를 위해서 1년 중 월평균기온이 5도 이상 되는 날이 100~200 사이 되는 곳을 찾아야 한다. 토양조건도 까다롭다. 물이 고이지 않아야 하며 산성토양을 피해야 한다. 봄에 심은 감나무 묘목은 10일 간격으로 20~30mm 강수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의 양과 관수 양을 조절해야한다. 그러면 9월이나 10월이 되면 당도가 가장 높은 단감이 되는 시점이 있다. 그 시점을 지나면 당도가 떨어지고, 가지에 붙어 있는 힘이 없어, 땅에 떨어진다.
농부는 그 순간을 포착하여, 나뭇가지로부터 감을 강제로 떼어내야 한다. 최적의 순간에 떼어내는 행위를 ‘카르페’라고 부른다. 이 행위를 위한 조건이 있다. 과실나무의 최적의 순간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농부는 최고의 맛을 내기 위해, 일 년 내내 자연에 순응하여 최적의 환경을 만들고, 탁월한 관찰과 식견으로 그 과실을 파격적으로 떼어내야 한다. 과실들이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순간을 놓치면, 오히려 나무와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이 과실을 땅에 버린다.
‘카르페’는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카르페’는 그 순간을 감지하여, 나무하는 과거, 구태의연함, 편안함으로 나를 강제적으로 분리시키는 예술적인 안목이다. ‘카르페’는 자신을 깊이 관찰하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자신만의 초신성 빅뱅을 관찰할 수 있는 예민한 정신적 수련자에게 주어지는 용기다.
5.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유대인들이 삶의 등불로 삼는 나침판과 같은 책이 있다. '선조들의 어록'(히브리어 제목, 피르케 아보쓰)이라는 책이다. '선조들의 어록' 1장 14절에 가장 위대한 랍비(기원전 110년~기원후 10년)인 힐렐의 어록이 나온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존재라면, 나는 누구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임 로 에카샤우 에마타이)”
‘지금’을 포착하는 능력이 새로운 시작의 총성이다. ‘카르페 디엠’이란 문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심연에서 요동치는 찬란한 빛을 본적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거기서 흘러나오는 숭고한 선율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천둥치는 큰 소리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을 포착하십시오. 더 늦기 전에.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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