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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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0-1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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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장수군 명덕리에서 ‘빨치산총사령관 이현상 부대’를 격파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車一赫)과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의 만남은 6․25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차일혁은 사내대장부로서 이현상에게 강한 승부욕을 같은 것을 일찍부터 지니고 있었다. 이현상을 꺾지 않고는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차일혁 특유의 강력한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다.

 이현상은 6․25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의 전설적 인물’로 전북 도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이현상이 드디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차일혁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현상이 택한 장소는 전라북도에서도 가장 험준하면서 지리산과 바로 연결되는 장수군 명덕리였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기로 했다. 전북 도내에서 이현상 부대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부대는 차일혁 부대밖에 없다는 것은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주지(周知)의 사실이었다.

 차일혁이, 이현상 부대가 전북도내에 침범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1951년 7월 13일이었다. 그 날은 차일혁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울 때였다. 아끼던 우희갑(禹熙甲) 1중대장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따랐던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과 도경 경무국장이 동시에 치안국으로 발령을 받고 가게 됐다. 차일혁의 능력을 믿고, 아껴주던 상관이 떠난다고 하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차일혁이 울적한 마음으로 치안국으로 발령을 받은 도경국장과 도경 경무과장의 이임식에 참석한 후, 도청 앞에서 열린 환송식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도경의 보안과장이 차일혁에게 급히 다가와서, “차 대장, 우리 관내에 이현상 부대가 나타났소. 장수군 명덕리 출장소에 이현상 부대가 출몰하여 지금 교전 중에 있소. 현재 장수경찰서 부대가 작전 중에 있고, 인접에 있는 지리산전투경찰대도 출동했으나, 아무래도 역부족인 것 같소. 18대대가 출동해야만 해결될 것 같으니, 정읍에 있는 부대를 본부로 불러들여 출동준비를 갖추시오.”라고 말했다.

 차일혁이 “그곳 작전지휘는 누가 합니까? 아무래도 여러 부대가 함께 작전을 해야 하는 만큼 부대 간의 협조와 통제를 위해서는 누군가 지휘할 사람이 있어야겠네요?”라고 말하자, 도경 보안과장이 “신임 도경국장이 부임하지 않았으니, 내가 그곳에 가서 지휘를 해야겠소. 내일 신임 도경국장이 오신다고 하니 그분께 상황을 보고한 후 출동하시오.”라고 대답했다.

 몇 개월 전 청주습격으로 유명해진 이현상 부대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차일혁은 “드디어 기다리던 적이 왔구나!”하고 내심 쾌재(快哉)를 불렀다. 그동안 이현상 부대의 활약을 접하면서, 이현상 부대가 그의 관내로 들어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던 차일혁이었다. 온갖 소문으로 ‘영웅시’ 되고 있는 이현상 부대와 한판 승부를 겨뤄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남한 사회에 퍼져있는 ‘이현상 공포증’을 해소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차일혁이 판단하기에 이현상 부대의 작전형태는 청주습격에서 알 수 있듯이 게릴라전이 아니라, 정규군의 전형적인 공격 형태인 정공법(正攻法)이었다. 이현상 부대는 전투를 할 때 경찰을 무시하는 정면공격을 통해 그들의 존재감을 한껏 부각시켰다. 이제까지 경찰이 상대했던 전북도당 방준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한 이현상 부대의 공격태도는 차일혁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차일혁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하필이면 왜 이럴 때, 자신을 믿고 밀어주던 김의택 도경국장이 바뀌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제18전투경찰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전투가 끝나버리지 않기만을 빌었다.” 차일혁 다운 호기(豪氣)였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 부대의 종군기자였던 전북일보의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차일혁에게 이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김 기자의 말에 따르면 “이현상은 일제강점기 시절 고향인 금산 부근의 덕유산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지리산 등지의 산세를 익히며 게릴라 연구를 했다.”고 한다. 김 기자도 1944년에 일제의 징용을 거부하고, 덕유산 단지봉 아래 작은 암자에 숨어 지냈는데, 그때 이현상을 만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알고 보니 고창고보(高普) 동문이었다. 두 사람은 말이 통했고, 그런 인연으로 광복 후 김만석 기자는 이현상의 추천으로 철도노조 용산지부장을 맡았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전주로 낙향했다가 전북일보 기자로 취직했다. 그리고 빨치산을 토벌하는 차일혁의 부대의 종군기자가 되어 이현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차일혁은 장수군 명덕리로 출동하기 위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대원들을 전주로 집합시켰다. 도내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이 차일혁의 명령을 받고 속속 전주로 귀대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읍에 있던 대원들만 도착하지 않았다. 전화로 확인해보니 정읍 주민들이 차일혁 부대가 전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일혁 부대가 정읍을 떠나면, 또 다시 빨치산들이 기습을 해올 것이라면서 주민들이 차일혁 부대의 차량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출발했던 정읍 부대가 전주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 서야 가능했다. 차일혁 부대는 정읍뿐만 아니라 토벌지역에서 주민들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다른 경찰부대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김의택 후임에 윤명운(尹明運) 도경국장이 1951년 7월 15일부로 부임해 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임 도경국장은 태백산전투경찰사령부에서 많은 공을 세운 전형적인 무골형(武骨型)이었다. 그렇지만 윤 국장은 이현상의 도내 출현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신임 국장은 부임 첫날 오후, 전주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이현상 부대의 출몰로 출동준비에 바쁜 차일혁 부대를 사열했다.

 사열(査閱) 후 신임 국장은 “나는 전북에 오기 전부터, 차 대장을 비롯한 귀관들의 충성된 조국애와 공비토벌에서의 공로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만나게 되어 가슴 뿌듯하다. 앞으로 본인은 제군(諸君)들에게 기대를 가질 것임은 물론, 4천5백 명의 전북 경찰들이 제군들과 똑같이 보조를 맞추어 갈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 주기 바란다.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로 혼란한 요즈음, 조국의 운명을 건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다.

 빈약한 장비와 어려운 난관 속에서도 오늘의 필승의 부대가 된 것은 모두 탁월한 차(車) 대장의 지도력과 감투(敢鬪)정신으로 응집된 국가관과 절대명령에 복종하는 여러분의 군기가 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라 믿고 있다. 아무튼 이처럼 비상시에 만나 출동하는 여러분과 첫 대면을 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건투를 빈다.”라며 격려를 겸한 훈시를 했다.

 7월 15일 오후 늦게, 차일혁 부대는 농협의 트럭까지 동원했음에도, 차량부족으로 전 대원을 태우지 못하고, 우선 3백 명의 대원과 중화기만 싣고 장계로 출발했다. 마음 같아서는 전 대원을 이끌고 이현상 부대와 결전을 벌이고 싶었으나, 차량동원이 용이치 않아 차일혁은 그러지를 못했다. 차일혁은 매번 열악한 상황에서 토벌작전에 나섰다. 칠보발전소 탈환 작전 때에도 차량 부족으로 75명의 대원만을 태우고, 2,500명에 달하는 빨치산을 대적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와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차일혁은 내심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장계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농무리에 도착했다. 그때가 저녁 6시경이었다. 차일혁은 그곳에서 하루 먼저 와 있던 도경 보안과장과 장수경찰서장 및 서원들로부터 빨치산들의 최근 동태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현상 부대는 지난 7월 11일 장수군 명덕리 출장소를 습격하고, 명덕리를 완전히 유린했다. 다음날 그들은 장계주변의 903고지, 악호산, 백화산, 삼봉고지를 점령한 후, 장계지역을 장악하고 장계지서를 노렸다.

 이에 장수경찰서 부대가 출동했고, 뒤이어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의 205경찰연대가 출동했으나, 이현상 부대의 공격으로 오히려 박격포 등 중화기를 적에게 빼앗긴 채 후퇴한 후, 겨우 외곽 포위망을 형성하고 빨치산들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도록 관망하고 있다.”고 했다.

 차일혁 부대가 장수군 장계에 도착했을 때 빨치산들은 3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물장난을 하며, 차일혁 부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차일혁은 외곽에서 포위망을 펴고 있는 205연대장에게 그간의 상황을 물었더니, “빨치산들은 마치 벌떼와 같이, 우리 후방을 포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물러나 있소. 잠시 저들의 기세가 꺾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무렵 빨치산들이 경찰 측에 ‘정전회담’을 열자고 제의해 왔다. 그들은 남부군 파견대장의 명의로 명덕지역 주민을 장계지서로 보내왔다. 내용인즉,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명덕지구를 ‘인민해방구(人民解放區)’로 해달라는 것과, 이에 응하면 포로로 잡혀있는 경찰들을 모두 석방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이 보기에 그들은 명덕지구에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여 운반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벌어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이현상 부대와의 첫 교전에서 27명의 부하들을 포로로 잡힌 장수경찰서는, 상부로 보고하는 것을 잠시 미루고, 적들이 제의한 정전회담을 놓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이에 차일혁이 일단 상부에 보고하여 지시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운을 뗐다. 그렇게 해서 빨치산들이 제의한 정전회담과 관련된 내용을 윤명운 도경국장에게 보고했다. 윤 국장과 도경간부들은 “빨치산들과의 회담이란 것은 불필요하니 단호히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많은 경찰들이 빨치산들에게 생포되어 있는 상태에서 공격만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한 차일혁과 장수경찰서장은 도경국장의 토벌지시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보내 빨치산들의 정전회담 제의 의도가 진짜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장수경찰서에서는 경비주임을 보내기로 했다. 차일혁도 “적들이 이현상 부대가 틀림없다면 한번 만나보는 것도 작전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차일혁은 이현상이 직접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차일혁은 전투에서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중요시했다. 차일혁은 누구를 보낼까 고민했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시 어려운 임무를 맡아 죽음을 무릅쓰고 완수했던 화랑소대장 이한섭이 가장 적임자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불러, “적들이 정전회담을 제의해 와서 장수경찰서 경비주임 박 경위가 협상자리에 참석하게 된다. 우리 부대도 적정 파악을 위해 누군가를 보내야겠는데, 자네가 이 임무를 맡아줄 수 있겠나? 이는 죽으러 가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키지 않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것은 명령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한섭 소대장이 “대장님의 말씀이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하며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첩과 경찰관 증명서를 꺼내 차일혁에게 맡기고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드디어 1951년 7월 16일 오전 10시, 두 경찰관은 빨치산과의 협상을 위해 그들이 정한 장소로 갔다. 오후 3시까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후 3시가 지나도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둘은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총각들이었다. 차일혁은 “행여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왔다. “1시간을 더 기다려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계획보다 1시간 늦은 오후 4시가 되자, 그 둘이 돌아왔다. 차일혁은 살아 돌아온 화랑소대장을 끌어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빨치산 대표는 사자(使者)로 온 박 경위와 이한섭 소대장에게 “우리가 점령한 이 지역을 해방구로 인정해 주시오. 절대 주민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소. 인민군이 이곳에 진주하게 되더라도 당신들을 해치지 않겠소.”라며 그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박 경위는 “이제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겠소. 이 문제는 일개 경위(警衛)에 불과한 우리가 여기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소. 돌아가서 상부에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겠소.”라고 말하자, 빨치산 대표도 “우리도 당신들이 결정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오. 상부에 보고해서 그 결과를 모레 정오까지 알려주시오. 경찰들은 다 무사하오. 당신들이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포로로 잡힌 경찰들을 풀어주겠소.”라고 호의를 베풀 듯이 말했다. 빨치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갔던 이한섭 화랑소대장은 “그곳에는 이현상 부대를 포함하여 약 1천 명에 가까운 빨치산들이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차일혁은 적진에서 돌아온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여 이곳에 와서 지휘를 하고 있던 윤명운 도경국장에게 그런 사실들을 낱낱이 보고했다. 윤 국장은 이현상 부대가 “포로가 된 경찰들을 석방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가 잔인하게 경찰들을 죽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이현상 부대의 포로 취급을 믿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윤 도경국장은 정전제의는 빨치산의 기만술책이므로 당장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차일혁의 18전투경찰대대를 선두로 전투경찰 205연대와 203연대 그리고 함양에 있던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의 병력이 동원됐다. 차일혁은 중화기를 빨치산들이 포진한 903고지를 향해 배치시키고, 대원들의 선두에 서서 공격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현상 부대와의 ‘역사적인 첫 전투’였다. 결코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 없었다. 차일혁은 진두지휘하면서 “여기서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했다. 그런 차일혁을 믿고 대원들도 고지를 향해 용감히 돌격해 나갔다. 차일혁의 중화기들도 뒤에서 대원들의 공격을 화력으로 지원했다. 차일혁 부대는 공격개시 2시간 만에 드디어 903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주변의 고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렇게 되자 완강히 버티던 빨치산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백화산 쪽으로 달아났다.

 차일혁 부대의 공격 성공으로 1백 시간 이상 빨치산들의 치하에서 고생하던 주민들과 포로들이 풀려나게 됐다. 풀려난 경찰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빨치산들은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의경(義警)들은 죽이지 않았다. 대신 정식 경찰은 ‘이승만의 주구’라 하여 즉결 처분했다. 이번에도 포로로 잡힌 20명의 의경들은 다시는 ‘경찰의 하수인’이 되어 빨치산에게 총을 겨누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러났다. 차일혁은 포로를 죽이지 않고 방면한 이현상이 고도의 심리전을 쓸 줄 아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적 포로에 관대한 부대는 실전에 매우 강하다.”는 것을 차일혁은 오랜 전투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차일혁은 여세를 몰아 경남과 덕유산 쪽으로 도망치는 빨치산들을 추격하여 섬멸할 것을 상부에 건의했으나, 상부에서는 “도계(道界)를 넘지 말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전북의 전투경찰이 모두 이곳에 집결되어 있어서, 지금 다른 지역은 공백상태이므로 한 곳만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마음 같아서는 즉시 추격전은 펼쳐 빨치산들을 섬멸하고 싶었지만, 상부의 지시가 있자 추격전을 중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차일혁 부대는 이번 전투를 통해 이현상 부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특히 차일혁의 성공적인 전투로 무주, 장수, 거창 방면의 교통로가 다시 열리게 되고, 1백 시간 이상 빨치산들의 수중에 있던 명덕리 일대가 치안이 복구되고, 행정이 재개됨으로써 이 지역에 평화가 찾아오게 됐다. 차일혁 부대는 이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적 사살 69명을 비롯하여 경기관총 1정, 60미리 박격포 1문, 따발총 2정, M1소총 1정, 아지트 파괴 2백 47개소, 양민구출 50명, 농우(農牛)가 38두를 획득하는 커다란 전과를 거뒀다. 차일혁은 노획한 농우 38두에 대해서는 장수경찰서를 통해 즉시 주인을 찾아 주도록 했다.

 빨치산에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경찰들의 말에 의하면, 이 작전에는 이현상이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북도당위원장인 방준표는 명덕리 점령에 참가했는데, 그의 부대는 이제 이현상의 지휘를 받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방준표는 약탈과 살상(殺傷)을 일삼아, 그의 간부 부하들이 하나, 둘 귀순해 와서 방준표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빨치산들은 이현상의 남하로 새롭게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차일혁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현상 부대와의 치열한 격전을 통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현상 부대에게 곤욕을 치렀던 대분의 경찰부대들은 이현상 부대와의 전투를 꺼려했는데, 차일혁 부대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현상 부대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오히려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상승무적(常勝無敵)의 맹호부대였던 차일혁 부대는 더욱 그 기세를 뽐내게 됐다.

 김의택 도경국장이 전보되고 새로 부임해 온 윤명운 도경국장이 차일혁 부대의 승리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이로 인해 김의택 도경국장 못지않게 신임 윤명운 도경국장도 차일혁을 신뢰하게 됐다. 그 중심에는 명덕리에서 이현상 부대를 맞아 통쾌하게 승리를 거둔 차일혁 경감과 제18전투경찰대대의 뛰어난 전투력과 드높은 전공이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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