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윤명운 도경국장은 차일혁을 더욱 신뢰하게 됐다. 윤 국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전북경찰부대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윤 국장이 구상했던 전투경찰 강화 방안은 도경 직할로 연대 규모의 전투경찰부대를 새로 창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윤명운 국장은 자신의 그런 구상을 차일혁에게 밝혔다.
윤 국장은 “남한에서 빨치산의 준동이 가장 심한 이 곳의 치안확보를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전투경찰부대가 필요할 것 같소. 이미 상부에 건의하여 부대 창설을 인가(認可) 받았소. 1개 대대를 증설하여, 연대 단위의 부대를 창설할 예정이니, 차(車) 대장이 지휘를 맡아 주시오.”라며 거의 부탁조로 말했다.
이에 차일혁은 “저는 계급이 경감(警監)이라, 지금 17대대와 18대대를 동시에 지휘하는 데도 힘에 버겁습니다. 새로이 창설된 연대 규모의 부대는 총경이 지휘해야 합니다.”라며 한사코 고사(固辭)했다. 하지만 윤 국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차일혁이 말을 끝내자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계급이 중요한 것은 아니요. 차 대장은 18대대를 창설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예부대로 만들었고, 17대대도 훌륭하게 지휘하고 있지 않소. 풍부한 실전 경험과 뛰어난 통솔력을 지닌 차(車) 대장 외에는 새로 창설할 연대급 부대를 지휘할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것 같소. 그 문제는 상부와 이미 협의하여 차(車) 대장을 내정해 놓았소.”라며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했다.
윤 국장은 이미 차일혁을 새로 창설된 연대급 부대장에 내정해 놓고, 예하 대대장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이쯤 되자 차일혁도 더 이상 자신의 입장만 고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 윤 국장이 또 다시 36대대를 맡을 대대장을 추천해 달라며 거듭 채근하자, 차일혁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읍경찰서의 특경대장(特警隊長)으로 있는 김석항 경위가 가장 적임자로 보입니다. 제가 그와 몇 번 작전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매우 우수한 지휘관인 것 같습니다.”라며 김석항 경위를 추천했다.
윤명운 국장은 새로 36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드디어 그의 노력 끝에 36대대가 창설됐다. 윤 국장은 새로 창설된 36대대에 기존의 17대대와 18대대를 묶어 연대급 규모의 새로운 경찰부대를 창설했다. 부대명칭은 윤명운 국장의 아호(雅號)인 철주(鐵舟)를 따서 ‘철주부대(鐵舟部隊)’로 명명했다. 하지만 차일혁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18대대 대원들은 철주부대라 부르지 않고, 끝까지 ‘18연대’로 불렀다. 차일혁의 부하들다운 자존감 높은 기개였다.
차일혁 경감은 진급을 하지 않은 채, 총경(總警)이 지휘할 연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을 비롯한 당시 경찰들은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경찰의 총수인 치안국장(治安局長)은 내무부의 일개 국장에 불과했다. 경찰계급은 각 도의 경찰국장들이 경무관(警務官)이었다. 더군다나 치안국장의 직급은 이사관(理事官)이었고, 그러다보니 경찰계급으로 가장 높은 계급은 경무관이 최고였다. 경찰에서 날고 뛰어봐야 경무관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계급상의 한계가 경찰 조직 내에 내재되어 있었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경찰관들의 진급이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불합리한 구조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경무관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경찰이 안고 있는 조직상의 제한 요소였다. 그러니 총경이나 경무관으로 진출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가는 사람도 없고, 조직이 확대되지도 않으니 진급하기가 갈수록 어려웠다. 진급할 자리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래 미 군정시절 경찰은 장관(長官)이 지휘하는 중앙부서였다. 바로 경무부(警務部)가 바로 그거였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어찌된 일인지 경무부는 내무부(內務部)의 일개 국(局)인 치안국(治安局)으로 대폭 축소됐다. 치안국장은 경찰계급이 아닌 이사관 대우를 받았다. 당시 국방부의 각 국장은 대령이 맡았다. 그러니 군으로 말하면 치안국장은 대령급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경찰로서는 정부 수립과 동시에 장관 직책이 대령급 직책으로 하향 조정되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반해 미 군정시절 군(軍)을 관장하는 부서는 통위부(統衛部)였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통위부는 국방부(國防部)가 됐다. 장관이 지휘하는 부서에서 그대로 평행 이동한 것이다. 그러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군은 조직 면에서 대폭 확대됐다. 전쟁당시 육군의 최고단위 부대는 사단급이었다. 그때는 사단장도 주로 대령들이 맡았다. 그러다 전쟁이 나면서 사단장은 대부분 준장(准將)으로 상향 조정됐고, 부대도 군단이 창설되면서 소장이 맡게 됐다. 국방부차관은 주로 소장 내지는 중장(中將)이 맡았다. 부대 소요가 많아지면서 사단급 규모가 새로 창설되고, 군단도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장군들의 소요도 경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상급부대가 다량(多量)으로 창설되면서 능력 있는 20-30대 젊은 고급장교들이 대거 장군으로 진출하게 됐다.
차일혁과 동갑이거나 나이가 적은 군인들도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으로 쾌속으로 승진했다. 계급도 대령에서 준장을 거쳐, 소장, 중장, 대장으로 빠르게 진출했다. 경찰에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정도였다.
차일혁과 동갑내기인 1920년생인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6·25전쟁 때 대령으로 사단장이었으나, 전쟁 발발 1개월 만에 준장으로 진급한데 이어, 8개월 만에 다시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군단장이 되었다가, 또 다시 9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그때가 1952년 2월이었다. 백선엽은 중장 진급 1년만인 1953년 1월에 다시 대한민국 최초로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때 나이 33세였다. 대령에서 대장으로 진급하기까지 불과 3년도 걸리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일혁과 동갑인 군번 1번 이형근(李亨根)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형근은 6·25전쟁 당시 사단장으로 육군준장이었다. 그도 전쟁발발 4개월 만에 군단장으로 진출한데 이어, 1954년에는 정일권 장군과 함께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초대 합참의장이 됐다. 이때 나이가 34세이다. 34세에 대장 진급과 함께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이 된 것이다.
차일혁 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유재흥(劉載興) 장군이나 국무총리를 역임한 강영훈(姜英勳) 장군도 그러 면에서 행운아였다. 유재흥 장군은 6·25전쟁 발발당시 준장이었다가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그로부터 16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후 유재흥 장군은 육군참모차장과 1군사령관 그리고 합참의장을 역임했다. 강영훈 장군도 6·25전쟁 발발 당시 대령으로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지내다가 1년 만에 장군으로 진급했고, 그 후 승승장구하여 소장으로 진급한 후 국방부차관을 거쳐 중장으로 진급했고, 그 후 6군단장과 육군사관학교장을 역임했다. 모두가 30대에 이룬 군의 고위 직책들이었다.
이처럼 군의 조직은 차일혁이 몸담고 있는 경찰보다 그 조직이 방대하고 규모가 컸다. 그런 관계로 유능한 장교들은 능력에 맞게 상위 진급이나 상위 직책으로 쭉쭉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능력이 문제였지 자리는 능력에 따라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이른바 올라가는데 조직상의 제한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경찰은 달랐다. 최고 계급이 경무관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관인 치안국장에다가 경찰계급으로서 최고인 경무관 직책도 기껏해야 도경국장과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 등 야전전투경찰사령관으로 한정됐다.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능력이 있고, 뛰어나야 더 이상 진출할 수가 없었다. 능력이나 전공과 관계없는 조직상의 문제였다. 이른바 경찰구조 자체의 한계였다.
차일혁은 그런 경찰에 몸담고 있었다. 차일혁이 경감 계급장을 달고 연대 규모의 철주부대장을 맡게 된 것도 제한된 구조의 경찰조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경감 계급장을 단 연대장이, 똑같은 경감 계급장을 달고 지휘하는 대대장을 지휘하게 됐다. 그것도 3명씩이나 됐다. 차일혁이 아니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차일혁이 그나마 경찰에서 대접을 받은 것도 전투지휘관으로서 능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다. 경감 계급장을 달고, 불과 8개월 만에 진급은 못했지만, 총경이 맡을 연대 규모의 경찰부대를 맡게 된 것도 그의 상관들이 차일혁의 능력을 완전히 인정했음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1951년 8월 2일, 철주부대장에 임명됐다. 계급 때문에 연대장 명칭은 쓰지 못했다. 18대대장에는 차일혁 밑에서 부대대장 겸 작전참모를 했던 이병선 경감이, 17대대장에는 김석원 경감이, 그리고 새로 창설된 36대대에는 차일혁의 추천으로 임명된 김석항 경감이 맡았다. 모두가 뛰어난 지휘관들이었다. 경감 밑에 경감 3명이 있는 묘한 지휘구조의 배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이미 그런 것에 초월했다. 차일혁은 직책이나 계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차일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뿐이었다. 차일혁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루빨리 도내(道內)의 빨치산을 소탕하여 후방지역을 안정시키고, 치안을 회복하여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 임명된 이후, 그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차일혁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했던 순백(純白)의 충심(忠心)과 애족애국(愛國愛族)의 열정으로, 오로지 다가올 임무만을 생각하며 기다리던 경찰의 독보적인 지휘관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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