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대칸 죽음이 가져온 두 가지 결과
[사진 = 13세기 몽골제국 ]
다시 몽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고타이 대칸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두 개의 결과를 가져온다. 대칸 구육의 등장과 자칫 역사 속에 묻힐 뻔 했던 툴루이가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가 그 것이다. 그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최대 관심사는 대칸 계승자
[사진 = 칭기스칸 궁전(울란바토르 교외)]
몽골의 유럽원정군은 몽골의 각 지파가 거국적으로 참가한 대규모 원정군으로서는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는 이런 형태의 원정군이 다시 구성되는 일이 없었다. 각 지역별로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각 가문의 대표자들이 참가했던 원정군의 주 관심사는 이제 정복전쟁이 아니었다. 서둘러 몽골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오고타이의 뒤를 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느냐 하는 것이었다.
▶ 의외로 대칸 자리 차지한 구육
칭기스칸의 손자代에서 유력한 후보자를 몇 사람을 꼽을 수 있었다. 오고타이의 둘째 아들 쿠텐과 장자가문인 주치가의 바투, 막내 툴루이 가문의 뭉케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오고타이가 죽은 얼마 뒤 차가타이도 죽었고 그 아들 무투겐은 그에 앞서 죽어서 차가타이가는 후보자로 내세울 사람이 사실상 없었다. 이제 칭기스칸의 아들 모두가 사라진 상황에서 손자 대에서 누군가가 그 유업을 이어가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사진 = 구육 초상화]
그러나 유력한 후보가 아닌 전혀 엉뚱한 의외의 인물이 대권을 가져가는 경우는 역사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로서 대칸의 자리를 차지한 구육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구육은 오고타이의 큰아들이기는 해도 여섯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말하자면 서장자인 셈이었다. 오고타이 생전에도 구육은 전혀 후계자로 고려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 유력 후보자는 모두 먼 곳에
[사진 = 바투 초상화]
오고타이는 지명했던 셋째 아들 쿠추와 넷째 아들 카시가 모두 죽으면서 둘째 쿠텐을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오고타이가 죽었을 당시 유력한 후보 세 명 모두 몽골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투는 헝가리 땅에 있었고 뭉케는 원정군과 함께 몽골로 돌아오고 있었다. 또 쿠텐은 중국 감숙 지역에서 티베트와 사천지방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두가 외지로 나가 있어 몽골 땅 카라코룸에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진 = 카라코룸 추정도]
그런데 유럽원정 도중 바투와 불화를 빚어 소환 당한 구육이 몽골 본토에 가장 가까이 와 있었다. 유럽원정군으로 참가했던 구육은 원래 사이가 좋지 못했던 총사령관 바투와 다툼이 있었다. 사이가 좋지 못했던 주치와 오고타이 관계가 그 아들 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오고타이는 즉각 구육에게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몽골로 돌아오던 구육은 오고타이가 죽었을 때 카라코룸 근처에 와 있었다. 이 점이 다음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기회를 만들어 줬다.
▶ 오르도 지킨 투르게네의 역할
[사진 = 몽골의 카툰(왕비)(몽골 국립박물관) ]
물론 여기에는 그의 어머니인 투르게네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오고타이의 정부인인 보락친 카툰은 오고타이에 앞서 죽었다. 그래서 오고타이의 유해는 다음 서열의 부쿠이 카툰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녀도 곧이어 죽었다.
그래서 그 역할이 구육의 어머니 투르게네 카툰에게 넘겨졌다. 오고타의의 유해가 있는 오르도를 지킨다는 것은 새 대칸이 선출될 때까지 국사를 책임지는 섭정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육과 투르게네에게는 최상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이때부터 투르게네는 구육을 대칸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 바투의 방해로 대칸 장악 4년 걸려
무리한 이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쉽지 않아 무려 4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구육의 대칸 즉위에 가장 큰 방해꾼은 러시아 원정 중에 서로 다투면서 개인적인 원한까지 생겼던 바투였다. 바투는 모든 면에서 칭기스칸 손자代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아버지代가 모두 사라지면서 유럽 러시아 원정 결과 얻은 성과는 이미 모두 그의 것이 돼 있었다.
[사진 = 칭기스칸 가묘 앞 궁정 무(舞)]
게다가 장자 가문의 우두머리로서 칭기스칸 가계의 사실상 최고 어른이었다. 누구도 바투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투 자신은 대칸 자리에 뜻이 없었다. 그렇지만 구육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은 원정 도중 자신의 편에 서 주면서 좋은 관계를 맺었던 툴루이의 큰아들 뭉케 쪽에 가 있었다.
아버지 주치와 막내 숙부 툴루이의 좋은 관계를 알고 있는 데다 바투의 어머니와 뭉케의 어머니는 케레이트 공주 출신으로 이종사촌 자매간이었다. 그래서 바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쿠릴타이 소집을 지연시켰다. 그래도 투르게네가 쿠릴타이를 강행하자 아예 쿠릴타이에 불참해 버렸다.
▶ 구육의 불안한 출발
[사진 = 몽골 장례용품]
1246년 8월, 카라코룸에서 멀리지 않은 오르콘강변에서 에케(大) 쿠릴타이가 열려 구육을 대칸으로 선출했다.
"몽골의 왕자들은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푼 채 황금 대좌에 앉은 구육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아홉 번 절함으로써 새 군주에게 충성을 표시했다."
대칸 즉위식을 지켜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카르피니는 그의 여행기를 통해 당시의 광경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전혀 고려에도 없었던 구육은 이렇게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출발부터 적지 않은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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