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일기] 벌레들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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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초빙 논설위원 (동양대 초빙교수·前 경향신문 편집인)
입력 2017-10-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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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해우당일기]

 

[사진=김지영 동양대 초빙교수·前 경향신문 편집인]



벌레들은 나에게

모두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벌레들의 종적이 묘연하다. 벌레소리는 9월 들어 희미해지더니 추분을 즈음해 사라져갔다. 가을밤, 귀뚜라미만 홀로 섬돌 밑에서 애잔한 소리를 내다 서리 내리는 상강을 지나 이제 입동을 앞둔 10월 말이 되자 그마저 뚝 끊겼다.
시골 생활이 서울 생활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면 역시 자연환경이다. 서울과 무섬마을을 오가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욱 차이를 실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섬마을에 머무는 동안 ‘시청각과 온몸의 세포가 전면적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벌레들의 존재가 그렇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벌레들은 존재감이 없다. 도시인들이 인지하고 있는 벌레라면 겨우 파리·모기와 같은 극소수 종류로, 사람들의 생활 현장에 출몰해 귀찮게 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쓸모없고 성가신 것들’, 완전한 소외세력이다.
나로서는 서울에서 옥상 농사를 한 5년간 하면서 새삼 벌레들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 바가 있긴 했다. 옥상에서 화초와 채소를 키우자 어떻게 사발통문들을 받았는지 벌과 나비, 개미는 물론이고 무당벌레, 소금쟁이, 여치까지 온갖 벌레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물론 뿌리에 유충이나 알이 묻어온 경우도 있을 듯하다).
그렇다 해도 그 정도는 벌레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인 인식이었다. 내가 무섬마을에 살면서 새삼 의문을 가진 건 “과연 이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이 인간인가?” 하는 점이다. 지구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는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과연 인간이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었다. 벌레들이 왕성한 늦봄과 여름, 초가을까지 내 귀에는 벌레소리가 상존한다. ‘내가 벌레들의 터전 일부를 점거하고 산다’는 느낌도 든다.
한여름 밤, 불을 켜놓은 사랑방은 벌레들에게 점령당한다. 틈이 많은 목조 한옥이어서 쉽게 진입했을 것이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어둠 속에서 오히려 그들의 실체를 더욱 뚜렷이 느낀다. 수많은 벌레들이 비행하는 소리와 천장과 전등 갓, 벽, 문 창호지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문 창호지에 부딪치는 놈들은 몸의 크기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작은 놈들은 소고 소리, 좀 더 큰 놈은 장구 소리. 북이나 팀파니 소리를 내는 놈은 작은 새만큼 큼직한 나방들이 분명하다.
도저히 그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고 퇴치작전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내가 질겁하는 소리가 날 때다. ‘퍼덕, 퍼덕’ 날갯짓 소리만 들어도 날개 가루를 마구 떨어뜨리는 퉁퉁한 나방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는 어둠 속에서 얼굴 위로 뭔가 날아가는 느낌에 손을 휘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벌이었다. 나는 이 벌에 뒷목을 쏘였다. 그런가 하면 자는 중에 뭔가 팔 위로 스멀스멀 지나가는 듯해 나도 모르게 손으로 후려치고, 불을 켜 보니 한 뼘이 넘는 큰 지네가 아닌가. 벌레퇴치용 약을 뿌리고 향을 피워보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방바닥에 벌레들이 수두룩하다. 빗자루로 쓸면 쓰레받기로 한가득이다. 내가 아는 벌레라면 모기, 좀벌레, 벌, 나방, 거미 정도. 그 대부분이 이름을 모르는 벌레들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참 예쁜 벌레도 많다. “넌 누구니, 어디서 왔니?” 하고 묻고 싶어진다.
나는 여름철이면 가끔 안대문을 잠가 사람 출입을 차단하고 대청에서 혼자 소일한다. 벌레들의 합창을 즐기기 위함이다.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사위는 온통 벌레 소리뿐이다. 가끔씩 새들이 간주를 넣을 뿐, 온 천지간이 벌레들의 세상이다. 때묻지 않은 자연이 온 몸으로 스며든다.
그러다가 오디오 기기로 음악을 틀기도 한다. 천장이 유난히 높은 대청이라 공명이 잘되는 덕에 이 소리도 즐길 만하다. 그런데, 소절과 소절 사이에서 음악이 잠시 멈출라치면, 다시 벌레와 새들의 합창이 대청 공간을 울린다. 벌레들은 레가토로 빼고, 거기에 새들은 주로 스타카토로 응한다.
벌레와 새들의 간주는 어떤 레퍼토리나 어떤 악기, 어떤 목소리에도 잘 어울린다. 베토벤의 영웅교향곡,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엘라 피츠제럴드의 ‘미스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배호의 ‘파도’,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단가 ‘백발가’, 스턴 게츠의 색소폰, 쳇 베이커의 트럼펫···. 다 틀어본 것인데, 그 어느 곡에도 착착 감겼다.
나는 한 달에 몇 차례씩 집안의 10여개 되는 방과 마루를 일제히 청소하고 군불을 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집의 행색이 금방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일단 먼지를 털어내고, 쓸고 닦는 순서로 진행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또 많은 벌레들을 만난다. 산 것도 있고 죽은 것도 있다. 티끌이나 먼지인 줄 알고 비질을 하면 비로소 움직이는 벌레들이 많다. 무엇이 벌레이고 무엇이 먼지인지,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먼지도 원래 나무나 벌레 같은 생명체였을 것이다.
나는 많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다가 간 방들에서 근원을 생각한다. 조상들과 나, 벌레와 먼지는 지금 다른 모습이지만 원래는 같은 우주의 자식, 별의 먼지였다. 다시 각각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시골생활을 하면서 벌레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니 벌레들은 미물이지만 지구 생태의 기반을 지킨다. 사실 지구생태를 훼손하는 건 인간이다. 지구생태 보전의 차원에서만 보자면 우리는 ‘버러지 같은 인간’,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욕을 할 자격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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