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상하이’에서 ‘상하이’가 언급된 것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상하이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던 까닭일 것이다.
'성 김대건'을 클릭하면, '19세기 조선 천주교 신부'라는 타이틀과 함께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공부했던 성 안토니 성당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소개돼 있다.
김대건 신부는 17세가 되던 조선 헌종 3년(1837년)에 마카오에 도착했다. 1831년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 조선 교구가 설립됐지만, 서방 열강들이 선교를 통해 통상압력을 가해오자 조선 조정은 천주교의 포교를 금지시켰다.
반면 유럽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정치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김대건 신부가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떠났던 때가 바로 산업혁명으로 자본이 형성된 유럽 열강들이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해 기독교, 군대, 통상을 무기로 동방국가들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던 시기다.
김대건 신부는 179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증조부가 순교한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신분이 결정됐던 폐쇄적인 사회다.
김대건 신부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실로 엄청난 신(新) 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가정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이 입국하는 것을 금지했고, 국외로의 출국도 금지했다. 김대건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혼란스러웠던 중국 대륙을 8000km나 종횡해 비로소 마카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엇이 ‘소년’ 김대건을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도록 했을까? 그가 봤던 사회는 태어나면서 불평등한 신분제, 빈부격차, 불합리 그리고 부조리가 판을 치던 조선 후기 사회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그 방편으로 신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는 단순한 천주교인이 아니라 신학을 배움으로써 후진적인 조선 사회를 개명하려 했던 시대적 소명의식이 투철한 선구자였다.
처음 마카오 여행을 준비할 때 포털에서 ‘마카오’ 혹은 ‘마카오여행’을 검색할 것이다.
연관 검색어나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김대건 신부가 공부했던 성 안토니 성당은 마카오 자유여행 ‘핫 플레이스’ 목록에 조차 오르지 못하고 있다.
마카오 여행에서 성지순례하듯 성 안토니 성당을 찾아보라는 주장이 아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보면 ‘소년’ 김대건을 감싸줬던 마카오 시민들의 따스한 손길도 읽혀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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