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박신혜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고 연기에 대한 애정으로 많은 작품들을 만나왔다. 결과는 놀라웠다. 대중들이 그의 어린 시절이 아닌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변신을 위한 변신이 아닌, “그 나이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인물”을 표현해 왔고 사람들은 서서히 그의 성장 과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침묵’(감독 정지우)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임태산(최민식 분)의 약혼자 유나(이하늬 분)가 살해당하고 그 용의자로 자신의 딸 미라(이수경 분)가 지목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또 달라진 박신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미라의 결백을 믿는 변호사 최희정 역을 통해 박신혜는 또 다른 편견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의 말처럼 분명 최희정은 그간 박신혜가 연기한 인물과는 다른 면면을 가지고 있다. 현실에 부딪혀 찌들어 있는 최희정은 어딘지 모르게 지친 인상이 가득한 것이다.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한 번은 감독님께 ‘왜 이렇게 많이 찍냐’고 물었는데, ‘신혜씨가 워낙 에너지가 많아서 다 빠졌을 때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여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하하하. 똑같은 장면의 반복이 아니라 여러가지 방향으로 경우의 수를 두고 연출하셔서 여러 변화와 변주를 줬죠. 맞춰가면서 수정하기도 하고요.”
그야말로 밀당(밀고 당기기라는 뜻의 준말)의 고수다. 정지우 감독은 박신혜에게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줬다.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지고 숙제 거리를 안겼다. 최희정이란 인물을 알아내기 위한 끈질기고 고달픈 작업이었다.
“감독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이해가 가지 않을 땐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했죠. 감독님은 답을 알려주지 않으시거든요. ‘배우의 한계를 정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접근성, 방향성을 알려주는 거지 답은 이미 당신이 알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고민이 정말 많았죠.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의심도 되고 ‘감독님이 원하는 건 뭘까?’ 생각도 많아지고요. 항상 숙제를 주셨고 검사받는 학생의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어요. 촬영을 마치니까 아주 후련하더라고요. 하하하. ‘왜 열성적으로 덤비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남긴 했지만요.”
그렇다면 가장 어려웠던 숙제는 무엇이었을까? 박신혜에게 묻자 그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면서 “두 가지가 있었는데 모두 삭제됐다”고 부스스 웃었다. 아쉬움이 남은 기색이었다.
“하나는 정승길(조한철 분)을 심문하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김동명(류준열 분)에게 진실을 묻는 장면이에요. 정승길의 경우는 제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는 임태산의 비서고 미라의 삼촌 같은 존재인데 너무 쉽게 심문을 해버렸다고 할까요? 전사를 따져본다면 분명 정승길과 희정 역시 알고 지낸 사이였을 텐데. 너무 단면적으로만 본 거예요. 그런 장면을 편집함으로써 장면의 입체감이 조금 살아난 것 같아요. 또 김동명과 만나는 장면은 CCTV를 발견하고 진실을 모두 알게 된 희정이 혼란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는데 감정 연기가 정말 어려웠거든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감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언성도 높였다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가 화를 참기도 했다가···. 어쩔 줄 모르는 희정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어요. 정말 어려운 장면이었는데 극의 흐름상 삭제됐어요. 개인적으로는 아쉽기도 하네요.”
극중 최희정과 임태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무기력했던 최희정이 활기를 되찾는 것, 희미했던 그의 신념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도 모두 임태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장 많이 부딪치는 만큼 임태산을 연기한 최민식과의 호흡도 중요했을 터였다.
“최민식 선배님과 한 화면에 나온다니! 정말 영광이었죠. 내내 팬심으로 선배님을 바라봤어요. 물론 연기할 땐 치열했지만···. 하하하. 매번 농담하고 장난을 치다가도 연기할 땐 확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희정이가 느끼는 여러 감정을 충분하게 끌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셨죠.”
어느덧 데뷔 14년차. 2003년 가수 이승환의 뮤직비디오를 시작으로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한 그는 자연스럽게 아역 배우라는 수식어를 지워냈다. “저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바통을 넘겼다”는 그는 어딘지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아역 꼬리표를 떼려고 욕심을 냈던 적도 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아등바등한다고 벗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재 맡은 바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벗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잘 자란 아역 배우, 정변의 아이콘’이라는 케이스에는 제가 안 들어가더라고요.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하하하. 앞으로의 길을 가야죠.”
“과거를 돌아보면 슬픈 기억보다는 즐거운 기억이 더 많이 난다”는 그는 “후회와 반성을 밑거름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한때는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싶었던 적도 있어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죠. ‘연기하면서 좋은 기억이 더 많은데 왜 자꾸 힘든 일만 찾고 있을까?’하고요.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많은 걸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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