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발릭’은 칸이 사는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투르크어로 당시의 대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지금은 인구 천만 이상의 국제도시가 된 북경의 거리를 오가는 숱한 사람들과 이 도시를 찾는 외국인들 가운데 이 도시의 뿌리가 북방 몽골인들의 구상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 대도의 흔적은 얼마나 남았나?
이방인들이 남긴 흔적을 끊임없이 지워온 중국인들이 과연 기념비적인 도시인 대도의 흔적을 얼마나 남겨 놓고 있을까? 카라코룸이나 상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후세의 중국인들은 몽골인들이 남긴 흔적을 보존하는 데 그리 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을 들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면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대도의 흔적이지만 그래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무언가 남아 있지 않을까?
▶ 몽골 고원에서 멀지 않은 북경
그만큼 북경은 과거 몽골의 땅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몽골과 중국의 국경도시를 출발해 10시간 이상 980킬로미터를 달려서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 대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가 본 곳이 쿠빌라이가 게르를 짓고 지내면서 대도 건설을 구상했던 곳, 서화담과 경화도였다.
▶ 동물들이 노닐던 궁궐 정원
그러던 것이 호수에서 파낸 흙이 이곳에 쌓이면서 더욱 커졌고 만세산(萬歲山)이란 이름이 붙여진 인공산(人工山)이 됐다. 이 만세산은 대도가 지어진 후에는 궁궐 안에 자리 잡은 정원이자 동물원이었다. 마르크 폴로가 묘사한 당시의 경산은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두 성벽의 사이에는 잔디밭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어 흰 숫 사슴과 사향노루, 황갈색 사슴, 다람쥐를 비롯한 각종 아름다운 동물들과 진기한 동물들이 뛰어 다닌다. 성벽 안에 있는 모든 공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들 아름다운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경산은 이후에도 계속 황실의 정원으로 가꾸어져 학과 사슴 등이 무리를 지어 다녔고 명나라 때에는 황제들이 이곳을 사냥을 하거나 화초를 감상하는 곳으로 삼기도 했다.
▶ 어경의 장소 경산
실정(失政)으로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잃었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1644년 이자성이 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북경성이 함락되자 처와 자식을 살해하고 이곳 경산에 올라 홰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기 전에 그는 비상종을 울렸지만 누구 한사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인심을 잃은 정권의 비참한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줬다. 이 산 동쪽에 있었던 그 홰나무는 문화혁명 당시 응징해야 할 4가지의 옛 것,즉 舊사상, 舊문화, 舊풍속, 舊습관으로 몰려 베어 없어지고 말았다.
▶ 즐거움이 가득한 삶의 현장
▶ 흥이 넘치는 노인들의 모임 장소
그들 사이에는 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은 5백 명 가량 되는 곳도 있었다. 리드하는 한 사람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은 진지해 보였다. 경산공원은 중국의 파고다 공원 같은 곳이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파고다공원이 소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데 열중하는 곳이라면 경산공원은 나이 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만들어 즐기는 데 열중하는 곳이었다.
▶ 연무에 뒤덮인 자금성
동쪽에 있는 두 정자, 주상정(周賞亭)과 관묘정(觀妙亭)에 서면 눈 아래 자금성이, 그 오른 쪽으로는 북해 공원이 펼쳐져 있다. 경산공원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자금성(紫禁城)은 지척이다. 자금성은 잘 알려진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이 된 곳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가 서린 천자의 궁궐이다. 중국에서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세상, 즉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을 하늘의 아들 천자라 부르고 그 도읍지를 땅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관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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