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적수담의 선박(그래픽)]
이는 곧 군사 초강대국인 동시에 경제와 통상의 초강대국으로의 변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도는 내륙 속에 거대한 항구를 껴안고 있는 도시였다. 항구는 바다와 연결되고 세계로 연결돼야 비로소 항구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다. 대도성 내 북서쪽에 거대하게 만들어진 인공호수 적수담! 그 것은 바로 바다로의 출발점이었다.
▶ 숲과 건물로 채워진 적수담 옛 터

[사진 = 적수담 수로]
그리 작은 호수는 아니지만 과거 그 자리에 있었던 적수담이 지금의 북해보다 두 배 크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부분이 흙으로 메워졌다는 얘기가 된다. 메워진 부분은 거리와 숲 그리고 건물로 채워져 있었다.
쿠빌라이가 대규모 호수를 파기 시작할 당시 그 자리에는 금수하(金水河)라는
하천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하천도 금나라 시절 주변 옥천산의 천수를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만든 물길로서 금나라는 이곳의 산수를 다듬어 황실 어원을 만들었다. 쿠빌라이의 공학참모 곽수경은 1,292년 이곳에 거대한 저수지를 파는 작업에 착수했다. 저수지 물은 기존의 금수하 물길을 이용해 멀리 창평(昌平) 일대에서 끌어 들였다.
북경의 북쪽에 있는 창평은 기원전 시대 만번한(滿番汗)이라는 이름으로 연 나라와 번조선의 국경선이었던 곳인 것으로 국내 일부 사학자가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북경시의 외곽 현으로 변해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리의 대도성까지 물길을 내는 작업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호수가 당시 옹산박(瓮山泊) 혹은 서해(西海)로 불려 지기도 했던 적수담이었다. 적수담을 만드는 작업과 대도에서 연결되는 수로를 건설하는 작업은 거의 동시에 추진이 됐다.
▶ 몽골제국 심장이 된 경제특구
적수담의 동북쪽과 종루 고루가 있는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시장과 경제관청이 들어섰다. 말하자면 적수담을 이용한 경제특구가 만들어진 셈이다. 적수담 물길을 이용한 운송체계가 만들어지고 경제특구가 형성되면서 이슬람 상인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적수담을 기점으로 방대한 규모의 물자와 사람들이 세계로 들고 나는 새로운 시스템을 창출해 냈다는 점에서 적수담과 그 주변은 몽골제국의 심장이자 세계의 심장 역할을 했다.
몽골족이 초원으로 물러간 뒤 들어선 명나라도 자금성으로 터전을 옮기기는 했어도 초기에는 적수담을 기점으로 하는 도시 내항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영락제 때까지의 일일 뿐 그 이후 명나라는 해상진출과 해상발전을 해금(海禁) 이라는 이름으로 막으면서 바다 쪽을 외면했다. 몽골족이 애써 마련해 놓은 경제와 교역 중심의 시스템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적수담을 기점으로 하는 바다로의 뱃길도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 적수담 자리에 송경령기념관

[사진 = 적수담 수로(그래픽)]
호수 아래쪽으로는 60년대 유명한 중국 경극의 연출가인 매란방(梅蘭芳)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옛 적수담과 그 주변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은 찾기가 어려웠다. 정작 적수담과 관련된 흔적은 호수가 있었던 자리보다 호수의 물길이 성 밖으로 빠져 나와 통주(通州)로 달려가는 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고궁 주변을 둘러싼 수로

[사진 = 북경 하수도 수로]
▶ 도심에서 만난 적수담 수로

[사진 = 적수담교 표지판]

[사진 = 통혜하]
▶ 기능을 잃어버린 통혜하 수로

[사진 = 통혜하 수로]
과거 많을 때는 하루 수백 척의 작은 배들이 이곳을 통해 적수담으로 들고났던 바로 그 수로였다. 거대한 호수와 연결됐던 수로는 지금은 어디에선가 물길이 끊겨 운하라기보다는 도심의 개천처럼 변해 있었다. 수로의 물은 오염 탓으로 검푸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사진 = 고기 잡는 중국인(통혜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