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사단으로 악명(惡名)을 떨친 빨치산 57사단은 여순10·19사건 이후 군경에 쫓겨 지리산(智異山)에 입산(入山)했던 반란군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빨치산들은 6·25전부터 이현상(李鉉相)의 직속부대로 활약해 왔다. 빨치산 57사단은 원래 경남도당 산하 부대였지만 반란군 출신 이영회를 대장으로 맞아 독자적으로 덕유산이 있는 무주 구천동까지 진출했다. 빨치산 57사단이 이번에 덕유산에 온 것은 이현상의 지령으로 6지대와 합류하고 경찰부대를 전멸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들은 제18전투경찰대대에 타격을 주었으나, 그들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차일혁 부대는 덕유산을 샅샅이 뒤지면서 빨치산들의 아지트를 분쇄(粉碎)해 나갔다. 신대부락 주민들 가운데 빨치산의 짐을 지고 갔던 남자들 대부분이 돌아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차일혁 부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들이 마지못해 빨치산의 짐을 날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또 다른 보복의 악순환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주민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보다가 차일혁 부대가 보복을 하지 않자, 그들은 차일혁을 찾아와 빨치산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다. 그들을 통해 차일혁은 빨치산에게 포로가 된 제18전투경찰대대 대원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수색을 하던 무주경찰서 사찰유격대가 빨치산들의 정찰대원 3명을 붙잡아 왔다. 차일혁은 그들을 심문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구천동 전투에서 제18전투경찰대대가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차일혁이 협곡을 피해 산위의 험한 길을 택해 후퇴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빨치산들은 협곡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차일혁 부대가 그곳으로 들어오면 전멸시키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그때 빨치산들에게 억류되어 있던 문 순경이 적진을 빠져 나왔다. 6일 동안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대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빨치산들은 문 순경을 그냥 돌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차일혁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를 살려 보낸 것이었다. 빨치산의 불꽃사단장이 토벌대장인 차일혁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토벌대장에게
우리의 인민(심곡리 주민)을 함부로 해치지 않은 귀관의 전사(戰士)정신을 높이 사는 바이다. 그러나 귀관은 우리 해방군(解放軍) 전사들을 수없이 죽인 우리의 원수이다. 이번 전투에서 귀관의 부대를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허나 귀관 부대의 유격전투 능력을 높이 산다. 우리가 이처럼 당신 부하들을 석방하는 것처럼 당신도 우리 동무들을 산으로 돌려보내기 바란다. 꼭 한 번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불꽃사단 사단장
차일혁은 무주로 출전한 후 1개월 이상 무주에 주둔하면서 구천동 작전 등 크고 작은 작전을 펼쳤다. 그런 후 차일혁은 전주로 복귀했다. 그때가 1951년 10월 27일이었다. 차일혁은 구천동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철주부대장을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단지 전투에서의 패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일혁이 가장 존경해왔던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을 비롯하여 친분이 두터웠던 도경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이 모두 다른 곳으로 전출해 가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차일혁을 아껴주던 김가전(金嘉全) 지사마저 최근 타계하고 말았다. 그런 모든 것이 차일혁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차일혁은 윤명운(尹明運) 도경국장에게 그동안의 전투 결과를 보고하고 구천동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辭表)를 제출했다. 차일혁은 사나이답게 “본인의 미숙한 작전으로 많은 대원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라고 사표에 대한 변(辯)을 그렇게 표현했다. 윤 국장은 “그게 무슨 소리요? 물론 구천동 작전에서 차(車) 대장이 처음으로 패배를 해서 많은 희생을 당했지만, 그래도 6지대를 섬멸하는 등의 성과도 있지 않았소? 차 대장답지 않게 무슨 그리 약한 소리를 하는 거요?”라며 당치 않다는 투로 말했다. 이에 차일혁은 “저는 더 이상 경찰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경찰이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그런 후 차일혁이 전북도경을 나서는데 지리산전투경찰대 작전참모로 있다가 이리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재춘 총경을 만났다. 그는 9·28 수복 후 고창경찰서장으로 고창수복작전을 했던 인물이다. 그때 차일혁도 그 작전에 참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차일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지리산의 공비들은 어떻소? 이현상 부대는 조용합니까.” 그러자 조 총경이 “말도 마시오. 소방차 노릇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오.”하며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그곳 상황을 이야기했다. 조 총경은 “이현상 부대가 기습하고 나면, 뒤늦게 출동해 뒷수습하는데도 정신이 없다. 그래서 작전이고 토벌이고 불가능하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차일혁은 조 총경과 헤어진 후 완산동에 있는 김가전 전북지사의 묘소를 찾았다. 그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동안의 작전 결과와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 지사 생전에 그의 총애를 받았던 보신병 최순경은 감회에 잠겨 눈물을 지었다. 그런 후 차일혁은 집에 들러 부인을 데리고 김규수 경사와 함께 완상동에 있는 원각사로 갔다. 그곳엔 빨치산토벌에서 산화한 젊은 영령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새로이 27명의 위패(位牌)를 새로 모시게 된 차일혁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 차일혁은 그날의 심회를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패 하나하나를 둘러 볼 때 꽃다운 젊은 육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구이작전 3명, 칠보공방전 12명, 고창수복 11명, 내장ㆍ덕태산 토벌 13명, 명덕리 탈환 및 고창 문수산, 완주군 주변 산악전투 9명, 가마골ㆍ금산 남이면 전투 8명, 그리고 구천동 전투로 27명의 위패를 모셨다. 구천동 작전이 다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6명도 전사한 것으로 보였다. 조국이 해방되면 고향에 돌아와 농사나 짓는 촌부(村夫)가 되려고 했던 나였건만, 해방 후 6년 동안 나는 더욱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헤매고 있었다. 여전히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연락병으로 명령에 충실했던 부하의 위패를 대하자, 차일혁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법당에 엎드려 오열했다. 그는 인공(人共) 때 부역한 사실이 있었으나, 차일혁은 그 일을 불문(不問)에 부치고 연락병으로 임명했다. 그는 차일혁을 위험에서 여러 번 구해 줬고, 늘 곰처럼 우직하게 명령에 따랐다. 흐느끼는 차일혁을 본 주지 스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차(車) 대장은 참으로 강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참으로 섬세한 사람이군요.”
차일혁은 부하나 동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자주 흘렸다. 사람들이 많을 때엔 얼굴을 돌리고 울었고, 주변에 사람이 적으면 목 놓아 통곡했다. 차일혁은 대원 한명 한명을 진정으로 아꼈다. 전투에서 대원들을 잃으면 마치 자신의 수족(手足)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파했다.
차일혁이 사표를 내고 얼마 안 있어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전북도경의 화약고가 원인모를 이유로 폭발했다. 그때가 1951년 11월 14일이었다. 이 사고는 차일혁의 신상에 영향을 미쳤다. 전북도경 화약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해 전주 시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화약고 폭발사건으로 최고 책임자인 윤명운 도경국장이 이날로 대기발령을 받게 됐다. 윤 국장은 차일혁을 불러 말했다.
“참으로 운이란 것을 알 수가 없구먼. 이틀 전 과음(過飮)하여 출근하지 않은 과장들을 일요일에 출근시켜 근신케 하려했는데, 만약 일요일 그들이 출근했더라면 화약고 폭발로 모두 즉사해 버렸겠지. 나에게 근신당하지도 않고 목숨도 건졌으니, 그들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반대로 나는 얼마나 운이 나쁜가…차(車) 대장 아무 소리 말고 사표는 없던 걸로 하겠소. 내 아호(雅號)를 따서 지은 철주부대도 이제 곧 해체될 거요. 차 대장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고 강물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시오.”하며 윤 도경국장은 차일혁이 며칠 전에 제출했던 사직서를 꺼내 찢어버렸다.
차일혁도 윤 국장의 행동에 어쩔 수 없었다. 차일혁은 윤 국장을 향해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빕니다.”라며 말했다. 윤 국장도 “차(車) 대장 부대원들의 동요가 없도록 잘 지휘하시오. 한번 떨어진 사기는 다시 살리기 어려우니 부하들을 잘 간수하시오. 곧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이 있을 거요.”라며 차일혁을 격려했다.
차일혁은 윤명운 도경국장을 떠나보내고 부대로 돌아와 사물함을 정리했다. 정들었던 김근수 경위도 금산경찰서 경무계장으로 발령이 났다. 부대원 중 다른 부대로 전출가는 것은 김 경위가 처음이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는 엄한 규율이 있어, 어느 누구도 다른 부대로 전출가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不文律)이었다. 이는 부대 초창기 해이해진 전투경찰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차일혁이 취한 조치였다. 당시 전투경찰은 군인과는 달리 근무 이탈하는 자가 많았다. 군대와는 달리 경찰은 사표만 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차일혁은 부하들을 집합시켜 놓고 “우리 부대에서 다른 부대로 전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처단하겠다. 휴가를 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者)는 반드시 잡아오겠다. 내가 전출가려 한다면 중대장들이 나를 총으로 쏴라. 중대장들이 전출을 갈려고 하면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우리 모두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윤명운 국장의 이임으로 철주부대는 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그러자 다른 부대로 전출가려는 대원들이 발생했다. 이때는 차일혁도 그들을 붙잡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차일혁 자신도 조만간 이 부대를 떠나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윤 국장의 후임은 전삼조(全三祚) 경무관이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차일혁은 신임 도경국장과 부딪쳤다. 그것은 칠보발전소를 경비하는 전투경찰대에 대한 도경의 홀대에서 비롯됐다. 차일혁이 빨치산들로부터 탈환한 칠보발전소는 제17전투경찰대대 일부와 정읍경찰서 의용경찰대, 청년방위대로 편성되었던 칠보발전소 전투경찰 경비대대가 맡고 있었다. 그들은 극도로 열악해진 보급으로 하루 2끼조차 힘들었고, 대원들 중에는 짚신을 신고 있는 자도 있었다. 군복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차일혁은 국가의 기간시설을 지키는 그들이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어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칠보발전소 전투경찰경비대대 대대장 김용이 경감이 차일혁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도경에서는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함에도 서로들 책임 전가에 바빴다. 차일혁은 김용이 대대장 사정을 듣고 국장실을 발로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차일혁은 전 국장에게 “저는 국장님의 청렴결백한 성품과 뛰어난 행정력에 대해 국장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밥을 굶으면서 전쟁할 수 있습니까? 배를 채워야 산도 타고 빨치산 토벌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부들이 국장님 눈치만 보면서 책임을 전가하는 바람에 칠보발전소 경비대가 하루 두 끼를 먹다 못해 거의 굶고 있는 실정입니다. 매월 부대 식량으로 지급되던 쌀 90석이 원리원칙을 따지는 바람에 중단됐습니다. 그들이 흙을 파먹고 전투를 할 수 있답니까?”하며 매섭게 항의했다.
전 국장은 차일혁의 강력한 항의에 경무과장을 불러 조치를 하고 나서, “차(車) 대장은 보통 때는 좋은데, 이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서 이야기할 때는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 같지가 않소. 얼마든지 좋게 보고할 수도 있을 텐데 꼭 나를 치려는 듯한 태도 같소.”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일혁이 “죄송합니다. 매일같이 빨치산 토벌을 하다 보니 제정신이 아닌 가 봅니다.”하며 꼿꼿이 말하자, 전 국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 국장은 도경 간부들로부터 차일혁의 올곧은 성정(性情)과 불같은 성미(性味)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윤명운 국장이 전보되자 그의 아호를 따서 만든 철주부대도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차일혁은 철주부대장 직에서 해임됐다. 철주부대 해체에 관련하여 전북일보에서는 “도내 각처를 전전하며 잔비(殘匪)의 소탕과 향토의 수호를 위해 도처(到處)에 남긴 공적(功績)과 혈흔(血痕)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부대장 차일혁을 비롯한 전 대원의 열렬한 정신과 불을 내뿜는 기개(氣槪)는 길이 계승될 것임을 믿는 바이다.”라는 요지의 기사를 게재했다. 부대장을 사임한 차일혁은 “재임시 도민(道民) 제위(諸位)로부터의 절대적 성원에 충분히 보답치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금번 결정적인 단계에 돌입한 소탕전의 작전상의 요청으로 철주부대는 해체케 되었으며, 따라서 본인도 부대장으로서의 직을 사임하게 됐다. 하지만 당분간 잔비(殘匪) 소탕의 제일선에서 계속 결사(決死) 분투할 작정이다.”라며 그동안 철주부대장으로서의 소회(所懷)를 밝혔다. 철주부대장을 사임한 차일혁의 다음 보직은 무주경찰서장이었다. 이제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으로서 그곳 빨치산들을 소탕하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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