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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3] 왜 강화도로 들어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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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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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오고타이 즉위 후 고려 공격

[사진 = 오고타이 초상화]

몽골이 군사를 동원해 고려침공에 나선 것은 저고여가 피살된 지 7년이 지난 1,231년이었다. 이때는 몽골의 대칸 자리가 오고타이에게 넘겨진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 해 오고타이는 직접 금나라 정벌에 나서 툴루이, 옷치긴과 함께 금나라 임시 수도인 개봉(開封)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사진 = 살례탑 추정도]

그 와중에 오고타이는 사르타크 코르치, 우리 역사에 살례탑(撒禮塔)으로 알려진 장수에게 3만 명의 기마병을 주어 고려를 정벌하도록 했다.

42년간 이어진 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몽골의 1차 공격은 의주와 귀주, 서경, 개경, 청주, 충주 등 주로 한반도 서쪽 지역에 집중되며 반 년 간 이어졌다. 하지만 몽골군의 공격이 파죽지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철저한 항전에 나선 평안도 지역의 귀주성(龜州城)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절반의 군사를 그 곳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 박서와 김경손의 영웅적 항전

[사진 = 김경손 열전(고려사)]

귀주성을 사수한 장군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그의 아래에 있었던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이었다. 이 두 사람의 항전은 몽골군의 장수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다. 이들에 대해 기록한 고려사를 통해 그때의 상황을 되살려보자. 몽고의 대군이 남문으로 몰려오자 김경손은 열두 용사와 여러 성의 별초(別抄)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면서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사진 = 여몽 전투도]

그러나 우별초(右別抄)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후 정주에서 함께 싸웠던 열두 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검은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선 기병 한 명을 쏘아서 즉사시키자 열두 명도 용기를 얻어 분전했다.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 내렸지만 북을 치며 독전을 멈추지 않았다. 네댓 번 맞붙은 후 몽고군이 퇴각하고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돌아오자 박서가 큰절로 맞이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이후로 박서는 성을 지키는 일은 모두 김경손에게 맡겼다.<고려사 김경손 열전>

▶ 무위로 끝난 몽골군의 귀주성 공략

[사진 = 박서의 대몽전투 지휘]

김경손의 분전은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공격으로 겁에 질려 있었던 고려군의 사기를 오르게 만들었고 공포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고려군은 박서와 김경손의 지휘아래 몽골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당시 만 명의 몽골 북로군을 지휘하던 몽골의 장수는 오야이였다. 그는 박서의 철저한 방어로 귀주성의 공략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고려군에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포로로 잡은 고려장수를 보냈다. 포로로 잡혔다가 몽골군의 요구로 항복권유에 나섰던 고려장수는 위주(渭州)의 부사였다가 박서 아래 있었던 박문창(朴文昌)이었다.
 

[사진 = 몽골군의 공격]

박서는 그러나 즉각 박문창의 목을 베어 버리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보였다. 다시 공격에 나선 몽골군은 이번에는 3백 명의 정예 기병을 뽑아 북문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지만 박서는 이를 즉각 물리쳤다. 정공법에 의한 공략이 어렵다고 판단한 몽골군은 망루가 있는 수레인 누거(樓車)등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그 안에 군사를 숨겨 성 아래로 접근해 갔다. 성 아래쪽으로 터널을 뚫어 침투하겠다는 의도였다.
 

[사진 = 투석기]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박서가 성에 구멍을 뚫고 끓는 쇳물(鐵液)을 붓자 수레가 불탄 것을 물론 병사들도 상당수 불에 타 죽었다. 여기에 땅까지 꺼져 압사자까지 수십 명 발생해 아비규환을 이뤘다. 그 상황에서 불이 붙은 섞은 이엉까지 투척하자 몽골군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이번에는 몽골군이 15대의 투석기를 동원해 성의 남쪽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사진 = 투석기 폭탄]

박서 역시 성 위에 대를 쌓고 같은 포차(砲車)로 맞서면서 돌을 날려 적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어 버렸다.
 

[사진 = 드라마 ‘무신’ 포스터]

다시 기름에 젖은 섶에다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자 박서는 물에다 진흙을 섞어 투척해 불길을 잠재웠다. 몽골군이 풀을 가득 실은 수레에 불을 붙여 접근시키면서 초루(譙樓; 성문 위에 세운 망루)를 공격하자 박서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누상(樓上)의 물을 쏟아 부어 불을 껐다. 몽골군이 성을 포위해 공격하기를 30일, 그 동안 갖가지 묘책을 동원해 공략했으나 박서와 김경손은 그 때마다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처해 몽골군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박서와 김경손의 활약은 2012년 방영된 드라마 ‘무신’에 등장하기도 했다.

▶ 강화를 내세운 사실상의 고려 항복
고려사에 나타난 박서와 김경손의 항전을 보면 몽골 장수도 감탄할 만하다. 공성전에 약했던 몽골군이 오랜 호레즘 전쟁과 대금(對金) 전쟁을 통해 그 취약성을 극복하고 난공불락이라는 성들도 어렵지 않게 함락시켰다. 그 것과 비교하면 귀주성의 저항은 몽골군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병사들이 아닌 초적(草賊)들까지 몽골군 공격에 가세했다. 초적이란 당시의 통치계급의 악정에 반대해 일어선 사람들이다. 이들과 천민인 부곡민(部曲民)까지 항쟁에 가담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조급해져서 먼저 강화를 요청한 쪽은 사르타크였다. 고려조정도 오래 동안 견디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요구에 응했다. 저고여 살해사건에 대한 해명과 황금과 백금, 비단, 말 등 엄청난 양의 선물을 몽골 측에 건네고 강화가 성립됐다. 몽골은 전국에 72명의 다루가치, 즉 지방감독관을 두어 그 지방의 행정을 관할하도록 해 놓고 적은 병력만 남겨 둔 채 몽골로 돌아갔다.

다루가치란 몽골이 점령지의 백성을 직접 다스리거나 점령지의 국정전반을 간섭하는 역할을 하도록 현지에 남겨 놓은 관리다. 다루가치를 남겨 놓았다는 것은 몽골이 고려를 점령지로 간주한다는 의미로, 말만 강화지 사실상은 고려의 항복이었다.

▶ 군민의 끈질긴 저항 예고
몽골군도 형식은 고려를 제압한 뒤 승전하는 모양을 취하며 돌아갔지만 그들도 사실 고려와의 첫 충돌에서 혼쭐났다. 금나라를 공략할 때 철옹성이라 불리던 거용관을 쉽게 넘었고 호레즘과의 전쟁에서도 오트라르성은 물론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성을 큰 어려움 없이 접수했던 몽골로서는 귀주성의 결사항전은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몽골은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귀주성을 고수하며 항복을 하지 않는 명장 박서를 죽일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최우는 박서에게 ‘충절은 비할 데 없으나 몽골의 말 또한 두려운 것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난처한 입장을 보였고 박서는 스스로 고향인 죽주(竹州;안성의 옛 이름)로 내려가 버렸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박서는 나중에 무신정권에 의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다시 등용이 된다.

그러나 김경손은 무신정권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돼 목숨을 잃고 만다. 초적과 천민들까지 가세한 공격도 다른 정복지에서 본 저항과 다른 것이었다. 호레즘 전쟁에서 자랄 웃딘이 곳곳의 세력을 모아 칭기스칸의 군대에게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 것은 민초들의 저항은 아니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보여준 귀주성의 항전과 민중들의 저항은 계속될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지를 암시해 주고 있었다.

▶ 항몽노선 선택-정권유지가 가장 큰 이유
몽골의 1차 고려 침공은 고려인들의 반감만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이 즐겨 사용했던 공포전술도 적어도 고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의 몽골에 대한 반감은 철저해서 겉으로나마 항복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몽골에 대한 저항을 준비했다. 강화도 천도는 그래서 단행됐다.

최씨 무신정권의 反몽골노선은 그들이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 성향이 유난히 강해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런 성향이 일부 있기도 했겠지만 그 보다는 그들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가 몽골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면 그들의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방안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지, 불리한 지를 따져보고 선택해 나가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떠나지 않으려는 고종을 강요하다시피 해서 강화 천도를 단행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다루가치 살해하고 강화로

[사진 = 강화 해협]

강화로 천도하던 1232년 7월, 장대 같은 빗줄기가 열흘 동안 쏟아졌다. 무릎까지 빠져드는 진흙길을 헤치며 조정의 백관들과 그 가족들은 백여 대의 수레에 짐을 싣고 강화로 떠났다. 최우의 강압에 못 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궐터로 들어섰다. 강화 천도와 함께 몽골이 1차 공격 후 두고 간 72명의 다루가치는 모두 처단했다.

다루가치가 점령지를 관할한다는 명분으로 공물의 수납과 운반 등의 일을 보면서 고려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점령지에 남겨 놓은 다루가치가 전원 살해되는 일은 몽골로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복수를 최우선적인 의무로 삼고 있는 몽골로서는 2차 침공을 감행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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