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빨치산들이 날뛰고 있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그리고 충청남북도에 대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빨치산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그때가 1951년 12월 1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날 0시를 기하여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에 걸쳐 비상계엄을 발령하고, 계엄사령관에는 이종찬(李鍾贊) 육군소장, 지리산지구의 빨치산을 토벌할 총사령관에는 백선엽(白善燁) 육군소장을 임명했다. 백선엽 사령관은 계엄사령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대행관(代行官)으로 계엄지역의 행정기관 및 경찰을 지휘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부대명칭은 미8군사령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백선엽 사령관의 성(姓)을 따서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 Task Force Paik)’로 명명했다. 백야전전투사령부는 4개 사단으로 편성된 군단급 규모의 빨치산토벌부대였다.
백야전전투사령부에는 육군부대로 송요찬(宋堯讚) 준장이 지휘하는 수도사단, 최영희(崔榮喜) 준장이 지휘하는 8사단, 김용배(金容培) 준장이 지휘하는 서남지구전투사령부, 그리고 전투경찰부대로는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의 4개 전투경찰 연대와 7개의 전투경찰 대대로 편성됐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일선 경찰서도 합류했다.
빨치산 토벌작전은 당시 국회가 후방치안 확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함에 따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미8군사령관에게 이를 간곡히 요청해 이뤄졌다. 당시 지리산을 중심으로 후방지역에는 빨치산의 준동이 심했다. 따라서 정부와 미8군에서는 이번에 후방지역의 골칫거리인 빨치산의 뿌리를 뽑을 것을 결정했다.
이른바 빨치산에 대한 발본색원(拔本塞源)인 셈이다. 당시 지리산 일대에는 이현상(李鉉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빨치산 남부군(南部軍)의 주력 3,8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본격적이면서도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전북 남원에 설치됐고, 미8군사령부에서는 백야전전투사령부에게 부여된 빨치산토벌작전의 공식 명칭을 '쥐잡기작전(Operation Rat Killer)'으로 정했다. 남한 주민들에게 유해(有害)한 빨치산들을 ‘쥐’로 지칭해서 붙인 작전명칭이었다.
작전은 철저히 군경합동작전(軍警合同作戰)으로 진행됐다. 1951년 12월 1일, 드디어 제1기 빨치산토벌을 위한 군경합동작전이 시작됐다. 제1기 작전은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독' 안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몰이 식으로 포위, 압축하여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빨치산들을 분쇄하는 데 작전 목적을 뒀다. 1기 작전은 2주간 계속됐다. 지리산에 4만 명의 군경 토벌부대가 투입됐다. 지리산을 에워싼 토벌부대는 주요 능선마다 100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상태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새웠다. 그러다 조그만 소리만 나도 그쪽으로 총탄을 퍼부었다. 당시 경찰이 맡은 임무는 산기슭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것이었고, 국군은 능선을 장악한 후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빨치산토벌을 위한 대규모 군경합동작전이 시작되자, 무주경찰서장 차일혁도 토벌작전에 임하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주경찰서 서원(署員)들은 아직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때까지 아직 서원들과 손발을 맞추지 못한 상태에서 토벌작전에 임하게 됐다. 그런 탓으로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나자 차일혁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그런 후 차일혁은 많은 전우들이 희생당한 무주 구천동의 심곡리와 삼공리 마을로 다시 들어갔다. 부대가 후퇴할 때 어려움을 마다않고 설천(雪川)까지 길 안내를 해 준 소년을 찾아내어, 그때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담아 표했다. 부대원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보복하려 할 때 차일혁에게 눈물로 애원했던 노인도 다시 만났다. 주민들은 차일혁이 보복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거듭 감사를 드렸다. 전쟁으로 인한 서로의 아픈 상처를 접어둔 채, 차일혁은 마을 주민들과 잠시나마 이야기꽃을 피웠다. 전쟁 중임에도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차일혁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정경((情景)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곡리와 삼공리 주변의 빨치산들이 예전과는 달리 마을 주민들의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느 날 빨치산들이 마을 의경대장(義警隊長)의 부인을 살해하자 마을 주민들도 더 이상 빨치산들에게 협조하기를 꺼려하며 그들을 멀리하게 됐다. 그러자 빨치산들은 점차 포악한 행위를 하게 됐다. 빨치산과 마을 주민들과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빨치산들은 마을 주민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그들을 멀리하면서 스스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먼저 걷어차 버린 꼴이 됐다.
비상계엄령 하에서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을 위한 군경합동작전에 차일혁이 지휘하는 무주경찰서는 수도사단을 지원하게 됐다. 빨치산들은 국군과 경찰에 밀려 전북유격대는 전북 완주군 운장산 방면으로 도망갔고, 전남유격대는 백아산과 백운산 쪽으로, 경남유격대는 덕유산 방면으로, 이현상의 독립 4지대는 지리산에 남아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수도사단은 경남유격대가 향했다는 덕유산을 포위하여 빨치산들의 숨통을 조여 나갔다. 수도사단장은 ‘타이거(tiger)'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송요찬 장군이었다.
수도사단 별칭도 맹호(猛虎) 부대였다. 차일혁과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이 오랫동안 지휘했던 제18전투경찰대대의 별칭도 맹호부대였고, 차일혁은 그런 전투경찰의 맹호부대장이었다. 지리산 일대의 대대적인 빨치산토벌을 앞두고 군(軍)의 맹호부대장 송요찬과 경찰의 맹호부대장을 지낸 차일혁이 지리산에서 만난 셈이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무주경찰서 부대는 수도사단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한 달 전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삼공리로 출동했다. 비교적 전투에 능한 대원들을 지휘하다가, 갓 훈련을 마친 대원들을 이끌고 출동하는 길에 차일혁은 계장, 주임에게 중대장, 소대장이라는 입에 익은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러자 차일혁과 같이 온 경찰서 보안계장 조명제 경위도 덩달아 차일혁에게 서장님이란 호칭 대신 자연스럽게 연대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래 놓고 두 사람은 서로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런 호칭 변경이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코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차일혁으로서는 경찰서 부대를 이끌고 처음 하는 전투라서 그런지 다소 어색한 감이 있었다. 서원들은 그동안의 혹독한 훈련으로 전투부대원 못지않은 기민하고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여 줬다. 산골짜기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어 빨치산들이 행동하기에는 제한을 받았다. 차일혁은 그런 점을 이용하여 부대를 배치했다.
이때 이병선(李炳善) 경감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도 무주에 대한 경비를 위해 구천동 입구인 나제통문(羅濟通門)에 주둔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대장 이하 대원들의 반가운 얼굴을 대하자 차일혁은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 봐도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이제는 혼자서 부대를 잘 이끌고 있는 이병선 대대장에게 차일혁은 현지 경찰서장의 입장이 되어 빨치산에 대한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고 건투를 빌어줬다. 옛 부하에 대한 상관의 따뜻한 배려였다.
군경합동작전이 계속되고 있던 중에 빨치산 2명이 안성(安城)지서로 귀순해 왔다. 보기 드물게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였다. 가끔 여자 빨치산들을 생포하거나 사살한 적은 있었으나, 남녀 빨치산이 함께 귀순해 온 적은 드물었다. 안성지서 주임이 비상 전화로 차일혁에게 보고했다.
“서장님 귀순한 공비(共匪)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데, 높은 분이 오기 전에는 절대 입을 열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표정으로 보아서는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일혁은 보고를 받고 안성지서로 급히 달려갔다. 귀순한 빨치산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에 손은 짐승과 다를 바 없이 거칠었다. 그러나 눈만은 긴장한 탓인지 생기(生氣)를 띠며 빛나고 있었다. 함께 안성지서에 갔던 김용식 사찰유격대장은 그들을 보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자들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차일혁은 귀순한 빨치산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식사를 하게 했다. 난로 곁으로 불러 몸을 녹이게 한 후, 그들을 심문했다. 남녀 빨치산들은 난로 곁에서 몸을 녹이면서 안도의 숨을 쉬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빨치산들은 통상 여자가 더 투쟁심이 강하고 끈질긴데, 남녀가 함께 귀순한 것을 볼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차일혁은 귀순해 온 빨치산들이 다소 안정을 되찾는 것을 보고 말문을 열었다. 일종의 심문이었다.
차일혁은 “나는 이곳 경찰서장인 차일혁이다. 너희들에게는 아마 제18전투경찰대대장으로 잘 알려졌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너희들이 가진 정보가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해도, 시간을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이제 식사도 하고 몸도 녹였으니 너희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란다.”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먼저 남자가 “저는 당신을 산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6지대가 남하할 때, 제가 소속했던 이영회 부대가 당신 부대와 전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동료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남자 빨치산은 계속해서 “저의 고향은 순천(順天)이고, 본명은 양희근입니다. 저는 여순병란(麗順兵亂, 빨치산들은 여순 10·19사건을 그렇게 부름)때 산에 들어와 제2병단으로 들어가 ‘노 동무(이현상의 별칭)’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현재 소속은 경남도당의 이영회 부대입니다. 3년간의 산 생활에서 솔직히 말해 많은 전공을 세움으로써 북한의 ‘국기(國旗)훈장 2급’도 받았습니다.
산에서는 임치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현재는 이영회 부대의 정찰대장입니다. 저와 함께 온 이 사람은 군산(群山) 출신으로 전쟁으로 산에 올라와 위생부(간호병)로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삭막한 산 속에서 만나, 이제는 서로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전쟁 전부터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지리에 밝아 부하 2명과 함께 정찰을 나왔다가 부하들을 죽이고 자수를 결심했습니다.”라며 자신의 신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털어놨다.
이에 차일혁이 “너희 부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양희근은 “대대적인 군경의 토벌로 우리 부대는 겨우 혈로를 뚫고 후퇴하여 안성면을 해방시키고 보급을 취한 후, 잠시 북상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을 계획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차일혁이 다시 “정찰대로 나왔던 네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빨치산들은 군경 토벌대가 안성을 지키고 있는 줄 알고 다른 길을 택하지 않겠는가?”라고 심문하자, 양희근은 “산사람들은 식량이 전혀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기 때문에, 안성을 습격해 보급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돌아가지 않아도 그들은 안성을 공격할 것입니다.”라며 빨치산들의 상황을 말했다. 차일혁이 그럼 “이현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양희근은 “노 동무는 백운산 방면으로 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양희근이 말한 노 동무는 이현상을 지칭한 것으로, 그 무렵 이현상은 노명선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빨치산들은 이현상을 ‘노 동무’로 지칭했다. 양희근의 말을 종합해 볼 때 빨치산들은 군경의 겨울철 대공세에 밀려 덕유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주군 안성면(安城面)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무주군 안성면은 무주의 평지와 덕유산을 잇는 지점이었다. 안성이 무너지면 무주도 위험해 질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의 빨치산 귀순자가 준 정보는 매우 유용했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비록 빨치산들이 지금 군경의 공격에 쫓기고 있으나, 빨치산 부대 중 가장 정예이면서 5백명이 넘는 경남과 전북의 혼성 빨치산 부대를 얼마 되지 않은 경찰병력으로 막는다.”는 것은 역부족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차일혁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귀순한 빨치산들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수도사단에 지체 없이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 요청을 받은 수도사단은 1개 대대를 안성으로 파견했다. 대대는 임시 지휘소를 안성지서에 설치하고, 김용식 유격대장과 괴목 출장소장 임덕준 경사를 정찰대로 내세워 산악지대에 배치했다. 수도사단이 중화기를 동원하여 산위에서 아래로 빨치산들을 밀어붙이고, 무주경찰서 부대는 조명제 보안계장의 진두지휘 아래 빨치산들이 후퇴할 곳에 매복시켰다.
새벽이 되자 빨치산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안성을 향해 내려왔다. 수도사단은 중화기로 빨치산부대의 후미를 공격해 후퇴로를 봉쇄했다. 날이 훤히 밝아서야 전투가 끝났다. 수도사단은 1백여 명의 사살과 수십 명의 빨치산들을 포로로 잡았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무주경찰서 부대는 도주하는 빨치산들을 공격해 60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2정과 소총 27정의 무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으로 무주 덕유산으로 입산하려던 빨치산들의 기도는 완전히 분쇄됐다. 겨우 혈로를 뚫은 빨치산들은 장계면 명덕리 방면으로 도주했다. 귀순해 온 양희근은 사살된 빨치산들 중에 간부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생포된 빨치산들은 모두 수도사단에서 데려갔다.
1951년 12월 19일부터 시작된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제2기 토벌작전은 지리산 외곽의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1952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 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해 1월 말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한 달 이상 계속된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군경합동작전의 성과는 대단히 컸다.
국군 8사단과 함께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지방 경찰부대를 지휘한 최치환 경무관은 사살 1천 3백 77명, 생포 5백 53명, 귀순 2백 99명, 주민 구출 1백 35명, 박격포 1문, 기관총 17정, 소총 5백 23정, 수류탄 2백 11개, 백미 40가마, 소 14두, 의류 5백 99점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줬다. 1952년 3월, 아직도 1천 2백 명 정도의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잔존한 빨치산 세력들은 이전처럼 강력한 저항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만큼 군경합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조선노동당 남부지도부 정치부책(政治副責) 여운철의 사살과 그에게서 나온 문서였다. 여운철의 몸에서는 중요한 정보가 될 보고문서들이 숨겨 있었다. 이들 보고서에는 “이현상의 확실한 지위를 인준해 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빨치산 내 각 도당(道黨)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현상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여운철의 사살과 함께 이현상의 전속부관인 고승균도 포로로 잡혔다. 이는 이현상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여운철이 지녔던 보고문의 진위를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확인된 이현상과 빨치산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즉, 구 빨치산이 아닌 ‘인공시절(人共時節)’ 잔류된 당 세포 및 ‘인민군’ 패잔병들이 이현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으며, 이현상을 지지하는 도당은 충남북도당과 경남북도당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충남북도당과 경남북도당은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였고, 전남도당은 이현상과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현상 부대는 무모한 정면 공격으로 그 세력이 약해져 갔고, 빨치산을 1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배치한 전략으로 인해 보급이 극도로 약화되어 이현상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차일혁이 지휘한 무주경찰서는 이 작전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웠다. 이에 따라 무주경찰서에서는 서장인 차일혁과 사찰유격대장 김용식 경사, 보안계 임덕준 경사가 금성(金星)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작전에서 모두 7명의 경찰관이 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무주경찰서에서 3명이 훈장을 받았다. 차일혁은 뿌듯함을 느꼈다. 이로써 차일혁은 지난 이현상 부대에 패한 설욕을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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