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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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2-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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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무주의 토벌작전을 마치고 임실 경찰서장으로 부임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은 무주경찰서장으로 군경합동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금성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전공을 세웠다. 치안국장을 대리하여 군경합동작전을 위해 남원으로 내려왔던 최치환(崔致煥) 경무관도 차일혁의 무주경찰서를 방문하고 전공을 치하했다. 그리고 지리산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덕유산을 결사적으로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 최치환 경무관은 떠나면서 빨치산 습격으로 전사한 의경(義警)들의 묘지에 들러 술을 한 잔 붓고, 시조 한 수를 지었다. “가신 님 무덤 위에 비바람 불어와도, 흘린 피 자국마다 피어 나네 무궁화는, 강산에 새봄이 오니 더욱 찬란하도다.”

 최치환 경무관이 다녀 간 후 차일혁은 겨울철 피폐해진 주민들의 실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무주 주민들의 상당수가 집이 없어 움막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주는 6·25전쟁 초기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공사자재가 보급되지 않아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고 있었다. 무주는 1950년 7월 24일 새벽 2시에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때 북한군에게 밀리다 무주지역에 이르러 퇴로가 차단당한 미 제1기병사단 예하의 대대의 탈출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 미군기가 7월 25일 무주읍내를 폭격했다.

 그 날 무주읍내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집을 비우고 피난을 떠난 탓으로 인명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가옥 등 시설 피해가 유난히 컸다. 군청·경찰서·학교 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일반 주택 거의가 폭격을 당해 무주읍내는 3일 동안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고 한다. 이 폭격으로 무주읍내의 건물 80%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무주에 대한 폭격은 이후에도 한 차례 있었다. 그때가 1950년 7월 29일이었다. 무주 읍내와 안성면(安城面) 일부가 폭격으로 인해 100여호나 되는 가옥이 또 다시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전쟁 초기 2번에 걸친 공중폭격으로 무주는 1천2백 가구 중 약 1천 가구가 파손되어, 엄동설한(嚴冬雪寒)임에도 주민들은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차일혁이 처음 부임할 무렵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쟁 중이라 자재를 구하기 힘들어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달리 정이 많은 차일혁이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차일혁은 이를 해결할 방도를 강구하고 나섰다.

 그때였다. 차일혁이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설천 지서주임의 기발한 착상으로 차일혁은 이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은 전쟁 중이라 일반 건축자재는 구하기 힘들었지만, 군수품으로 보급되는 건축자재는 상급기관에 요청하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차일혁은 이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도 차일혁은 자신의 출세(出世)나 안위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주민들을 도울 수 있다는 데에만 온갖 정신이 쏠렸다.

 마치 그때는 빨치산들의 기습에 대비해 지리산 지역의 행정기관에서는 참호공사(塹壕工事)를 실시하고 있었다. 빨치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지리산 인근의 각 지방마다 공사자재를 지급받아 참호공사를 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차일혁은 “관내 많은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는 설천면(雪川面)에 참호 30개, 무풍면(茂豊面)에 참호 20개가 필요하다.”고 보고하여 막대한 양의 공사자재를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를 통해 유엔군사령부로 요청했다. 공사자재는 바로 보급됐다. 차일혁은 비록 그의 그런 행위가 불법(不法)인줄 알았지만, 추위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일혁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공급된 공사자재를 주민들이 자신의 집을 보수하는 데 쓰도록 골고루 나눠 줬다. 차일혁 다운 용감한 발상이자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은 “참호가 없어도 빨치산들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가졌다. 실제로 그럴 자신도 있었다. 설령 일이 잘못되어 자신이 징계를 받는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수(甘受)하리라 마음먹었다. 차일혁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추위에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집을 만들어 주어 눈바람을 막으며 따뜻하게 잠을 자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잘못되어 징계를 받는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차일혁에게 그런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차일혁은 이전에도 “상급부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징계를 받으면서도, 구례 화엄사(華嚴寺)를 비롯하여 천년고찰(千年古刹)들을 화마(火魔)로부터 구해내지 않았던가!” 그런 차일혁이었기에 엄동설한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보고 가만있지 못하고 과감히 나서게 됐던 것이다. 이른바 추위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긍휼(矜恤)히 여기는 차일혁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또 다시 발동한 것이다. 주민들은 그런 선행을 베푼 차일혁과 설천지서 김옥현 주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전북일보에서도 〈밝아진 무주(茂朱)거리, 차(車) 김(金) 양씨의 노력〉이라는 제목 아래, 차일혁이 집 없는 무주 주민들에게 행한 선행사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전북일보에서는 “6·25전화(戰禍)로 폐허화한 무주의 음울한 거리에 탁월한 수완으로 주민에게 명랑한 생활을 이루게 한 민주 경찰의 귀감이 있다.”라고 운을 뗀 뒤,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무주는 사변(事變) 중 천2백호 중 천호(千戶)가 파괴되고, 혹한의 거리에 움막 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당국의 후생주택도 자재공급도 말뿐, 천호(千戶)의 이 땅의 동족(同族)은 문자 그대로 암흑세계를 면치 못하고 있던 중, 차(車) 서장의 예민한 수단과 설천지서장 김옥현의 치안확보에 있어서의 ‘귀감’이라고 불릴 공적으로 인하여 이곳 전 주민은 현생(現生)의 기쁨과 같이 민주경찰관의 시범에 감사하고 있다.”

 그로부터 어느 날 김진원 면장과 무주여중 박봉자 선생이 차일혁의 집을 방문했다. 박 선생은 국방부장관 이기붕(李起鵬)의 부인인 박마리아의 제자로 유엔군이 무주에 들어왔을 때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기붕 장관과 박마리아 여사가 됐다. 박봉자 선생이 “부산 대청동에서 이기붕 장관과 박 여사님을 뵈었는데, 차 서장님의 안부를 물으시더군요. 언제부터 그분들을 알고 계셨는지요?”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차일혁은 깜짝 놀랐다. 그는 여태껏 두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차일혁의 부인이 차일혁의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제가 서울 관훈동에서 박 여사님이 ‘서울상회’라는 가게를 할 때부터 그분들을 알고 지냈습니다. 저도 박봉자 선생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차일혁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보고 내심 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모르는 일들이 벌어진 것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었다.

 박봉자 선생이 돌아가자 차일혁은 아내를 보고 “당신은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가? 바른대로 이야기 해 보시오.”라며 크게 역정을 냈다. 부인은 박 마리아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줬다. 차일혁은 편지를 집어던지면서 “나도 모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큰소리를 냈다. 그때 무주에 함께 와 살고 있는 할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면서, “부부 사이의 일에 남이 참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아네만, 오늘은 이 늙은이가 좀 참견해야겠소. 차(車) 대장이 그동안 정신없이 전투하러 다니는데 괜히 신경이 쓰일까봐, 사모님이 국방부장관 부인과 안면이 있고 편지 왕래가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던 거요. 차 대장의 속이 그렇게 좁은지 몰랐군요. 더 이상 이 집에 머무르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 나는 떠나야겠군요.”라고 점잖게 말하자, 차일혁도 그 말에 당황한 나머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를 드렸다. 할머니는 비록 차일혁의 집에 머물고 계시지만, 엄연히 어른인지라 자신의 목소리가 컸던 점에 대해 사과를 드렸던 것이다.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최치환 경무관이 지시한 빨치산 토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52년 3월, 차일혁의 무주경찰서는 빨치산 7명을 사살하고, 12명을 생포하여 구천동의 빨치산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쾌거(快擧)를 달성했다. 그로 인해 구천동의 봄 경치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장장 80리에 달하는 명경(明鏡) 같은 맑은 물이 굽이굽이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천하의 명승지인 이곳을 그동안 계속되는 작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됐다. 그러나 이제 구천동의 빨치산을 소탕하게 됨으로써 구천동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무주경찰서장으로 온 차일혁이 무주 군민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무주경찰서장 차일혁에게 얼마 후 좋은 일이 생겼다. 6·25전쟁 2주년을 맞이하여 이기붕 후임으로 국방부장관이 된 신태영(申泰英) 장군으로부터 금성화랑무공훈장과 6·25 종군기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방위포장(防衛襃章)을 받았다. 그때가 1952년 6월이었다.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차일혁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6·25전쟁 직후 전북편성관구사령관 겸 서해안지구전투사령관으로 전주로 급히 내려 온 신태영 장군은 그 당시 전주에서 청년방위대 제15단 총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차일혁을 현역 육군대위로 임관시킨 분이었다. 이후 차일혁은 전주 일대에서 재창설되는 7사단 구국의용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군이 후퇴하자 그곳에 계속 남아 옹골연유격대를 지휘하다 부상을 당했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차일혁은 결국 군문(軍門)에서 나와 전투경찰로 투신하게 됐다.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52년 8월 4일이었다. 무주경찰서 기동대장으로 이건양 경사가 새로 부임해 왔다. 새로 부임해 온 기동대장은 며칠 안 돼 포스터 제작과 환경 정리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차일혁은 기동대장에게 빨치산토벌을 위해 총을 잡기보다 특기를 살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기동대장 역시 전쟁만 끝나면 미술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병역(兵役)과 생활문제로 지금은 경찰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꿈인 그림을 계속하겠고 했다. 그는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일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가였다. 차일혁은 전투에 소질이 없는 경찰이나 대원을 굳이 전투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새로 온 기동대장을 다른 부서로 배치해 줬다. 능력에 맞게 부하들을 배치해 주는 것은 차일혁의 독특한 인사 원칙이었다.

 차일혁은 우리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차일혁은 어디를 가든 문화예술인들과 인연이 있었다. 무주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햇님달님 여성국악단’이 찾아왔다. 문화혜택을 받지 못한 오지의 무주는 악단이 찾아오자 온통 잔치분위기로 변했다. 각 면에서 공연을 보려고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무주에 평화가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가 1952년 10월 25일이었다. ‘햇님달님 여성국악단’은 1주일간의 무주에서의 공연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차일혁은 여성국악단이 다음 공연 장소인 충북의 영동으로 가기 전, 그들을 데리고 무천동으로 가서 많은 부하들이 산화한 구천동 계곡에서 진혼제(鎭魂祭)를 지냈다. 부하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서다. 굿이 끝나고 국악단원들은 맑은 물에 뛰노는 큰 고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신기해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차일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기를 잡으려고 수류탄을 물속에 던졌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실수로 손가락 세 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차일혁은 전투 중에는 절대로 산짐승을 잡지 않았는데, 그날은 자신의 그런 불문율을 깜박 잊고 물고기를 잡으려다가, 많은 부하들과 빨치산들이 희생된 바로 그곳에서 크게 다치게 됐다. 차일혁은 병원으로 달려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손가락뼈를 자르고 실로 꿰맸다.
차일혁은 전투지휘관을 하면서 3가지 금기(禁忌) 사항을 정해놓고 이를 지켜왔다.

 차일혁에게는 일종의 미신(迷信) 비슷한 3가지 금기였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과, 작전 중 절대 노루를 잡지 않는 것, 그리고 사찰(寺刹)을 절대 소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노루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노루를 잡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었고, 차일혁도 그러했다. 개고기에 대해서는 전쟁 초기 유격전을 할 때 식량을 구하러 원기리에 있는 사돈집에 가서 개고기를 먹던 그날 바로 총에 맞는 불상사가 있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먹는 것에 대해서 말리지는 않았지만, 차일혁은 이를 꼭 지켰다. 사찰에 대해서는 어릴 적부터 외경심(畏敬心)이 있어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차일혁은 작전 중 빨치산들이 사찰의 암자에 숨어 있을 때도 공격하지 않았다.

 차일혁은 부하들의 진혼제를 올린 날, 자신이 정한 계율(戒律)을 지키지 않아 어이없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주경찰서 조길호 보안계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경으로 달려가서 김종원(金宗元) 도경국장에게 차일혁이 훈련 도중 수류탄을 잘못 다뤄 부상을 당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차일혁이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상사(上司)를 위해서, 그리고 도경의 최고상관에게 허위보고를 한 셈이었다. 그 일은 다음날 최찬택(崔讚澤) 도경 보안과장의 무주방문으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김종원 도경국장과 감찰과장이 직접 무주에 와서 조길호 보안계장을 면직(免職) 처분했다. 김종원은 백두산호랑이를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운 자였다. 군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아 경찰로 투신했던 인물이다. 특히 김종원 신임국장은 전삼조(全三祚) 국장 후임으로 부임한지 2개월 밖에 안됐다. 김종원은 1952년 7월 28일 전북도경국장으로 부임해 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차일혁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기로 결심했다. 차일혁 다운 문제 해결방식인 결자해지(結者解之)였다. 그래서 경찰에 투신한 지 세 번째로 사표를 제출했다. 경찰을 영원히 떠날 참이었다. 차일혁은 못마땅해 하는 도경국장에게 “허위보고는 자신이 시켜서 한 일이니, 보안계장을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 도경국장은 “차(車) 서장은 24시간 내로 임실서장으로 부임하시오. 사표는 빨치산 토벌이 끝난 후 내무부장관에게 내시오. 차(車) 서장을 아끼는 마음에서 이번만은 눈감아 주겠소.”라는 뜻밖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은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무주지역의 빨치산을 완전히 소탕하였음에도 무주를 떠나, 임실(任實) 경찰서장으로 가게 됐다.

 그렇지만 전북도민과 무주군민 그리고 전북일보는 차일혁의 주민을 위한 선행(善行)과 뛰어난 전공(戰功)을 잊지 않았다. 전북일보에서는 임실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차일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무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차일혁은 11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100여정의 무가와 100여명의 빨치산을 사살하여 자칭 ‘맹호’라고 하는 이현상(李鉉相) 부대의 주력을 산산이 분쇄시켜 도주케 하고, 무주 구천동까지 완전히 복구시키고, 민심을 수습하여 민폐(民弊)를 근절시켜, 향민(鄕民)의 존경을 받고 있던 바, 금반(今般) 도내(道內)에서 무주에 못지않게 치안 상 중요한 임실 경찰서장으로 영전되어 지난 1일자로 부임하였다…차(車) 서장을 아끼는 무주 군민(郡民)들은 차(車) 서장의 공훈을 찬양코자 여학생들이 화환(花環)을 증정하는가하면, 석별(惜別)의 정(情)을 못 이겨 낙루(落淚)를 하는 주민(住民)들도 있었다.”

 차일혁의 공적과 선행을 잘 알고 있던 전북 도민(道民)과 군민(郡民)들이 있었기에 차일혁은 어디로 가든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것을 믿고 차일혁은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최선을 다 했다. 차일혁은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직무인 빨치산 토벌에 충실했고, 나아가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민주경찰로서의 직분을 완수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임실 경찰서장로 부임하는 차일혁에게 또 다른 기대를 해 본다. 차일혁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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