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29] 역참(驛站)은 왜 중세 인터넷인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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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3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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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말을 이용한 네트워크

[사진 = 대몽골제국 분포도]


오늘날 지구촌의 개념은 교통과 정보통신 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7백여 년 전에도 오늘날 정보 통신 혁명에 견줄만한 시스템이 있었다.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전자 통신 대신 말(馬)을 이용해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어 냈다. 그 것으로 몽골제국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시켰다.
 

[사진 = 달리는 말]

당초 그러한 시스템구축은 전투에서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됐다. 칭기스칸과 그 후손들이 벌인 수많은 전투는 적(敵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진행돼 대부분 승전을 기록했다. 정보가 곧 재화라는 유목민의 생활화된 자세가 전투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보가 원활히 흐르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교통과 통신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것이 바로 역참(驛站)제도이다. 당초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던 이 시스템은 통치 지역이 넓어지면서 그 활용도가 크게 높아졌다. 우선 넓은 지역에 대한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이 시스템을 계속 업그레이드 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 역참 통해 사람과 정보 흘러

[사진 = 실크로드 대상]

쿠빌라이 시대 이후 몽골제국은 대원제국과 4개의 한국(汗國)으로 분리됐으나 그 것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크게 봐서 대몽골 제국의 안에서 연결돼 있는 하나의 제국으로 볼 수 있다. 즉 넓어진 제국 경영과 통치의 필요에 따라 교통과 정보 인프라가 확대 발전 돼 갔다는 얘기다.

또 이 역참제는 물류시스템 구축을 통한 원활한 교역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 물자가 흐르고 사람이 흐르고 정보가 흘렀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는 바로 이런 시스템이 있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 기원전부터 활용된 통신 수단
역참제는 몽골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시스템은 아니다. 기원전 시대부터 국가 관리와 통치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고대 앗시리아(Assyria)와 페르시아 다리우스 시절 역전제(驛傳制)를 운용한 기록이 있다. 이것이 동양에서는 역참제의 형태로 변형된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역참제가 활용됐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는 국가 기관으로 발전했다.
 

[사진 = 공역서 언급 고려사]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역참제를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때는 병부(兵部)아래 역참으로 담당하는 기관으로 공역서(供驛署)라는 것이 있었다. 이 공역서는 각도의 참역(站驛)을 관리하면서 명령의 전달과 역마의 동원 등의 임무를 맡아 보던 관부였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서 앞서 가는 원의 제도를 접합시키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충렬왕 2년인 1276년에는 포마차자색(鋪馬箚子色)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 여기서는 역마를 징발하여 타는 것을 허락하는 증명서인 포마차자의 발급에 대한 사무를 맡아봤다. 포마는 역전의 말을 의미하고 차자는 간단한 상소문으로 역마를 지급하는 공문서를 의미한다.
 

[사진 = 구파발, 파발제 행사]

몽골의 요구에 의해 설치된 이 관청은 왕의 측근 세력 일부가 역마를 함부로 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실질적인 설치 이유였다. 조선시대 역시 병조(兵曹)에 소속된 승여사(乘輿司)라는 기관이 역참업무를 담당하면서 역(驛),관(館),참(站) 등의 역참이 설치됐다.
 

[사진 = 조선시대 마패]

그러나 정조이후에는 마색(馬色)이 설치돼 승여사의 일을 이어 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사기밀 문서를 신속히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발제(擺撥制) 도입됐다. 지금 명칭이 그대로 남아있는 구파발(舊擺撥)은 한양 서북방면에 설치된 교통 통신의 요지였다.

▶ 역참 운용 방법의 차이
여러 나라가 오래전부터 역참제를 운용해 왔는데 유독 몽골의 역참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역참의 운용원리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주민 국가의 역참은 중앙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따라 설치가 됐다.
 

[사진 = 몽골인 말 사육]

그 것은 바로 중앙집권 원리에 충실한 선(線)의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몽골인들은 도로, 즉 길의 개념이 희박한 유목민들이다. 그런 몽골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손에 넣고 통치지역이 넓어졌을 때 각 제국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연결했을까? 바로 선(線)이 아니라 점(點)의 체계로 연결한 것에 그 답이 있다.
 

[사진 = 나담 축제장 어린이]

쿠빌라이가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을 만들고 경항대운하를 정비하는 등 바다로 향하는 물류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도로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고 정비했다는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몽골제국은 도로가 없는 초원과 사막을 바둑판처럼 잇는 점의 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몽골의 역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 등 여러 상황에 따라 그 때 그때 점의 지점이 바뀌고 전달경로도 변했다는 점이다. 선을 통한 연결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경우 그 것을 피해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역참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네트워크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전제아래 운용됐다. 그래서 이 체제는 상황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그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녔다.

이러한 시스템의 선택은 유목민들이 그들 생활에서 나온 지혜를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 점을 통한 체계 - "중세 인터넷"
현재의 정보 통신 혁명을 주도하는 인터넷과 이동 통신은 바로 ‘선’이 아니라 ‘점’의 체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제국의 역참제를 중세의 인터넷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몽골의 역참제의 기초는 칭기스칸에 의해 군사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졌다.
 

[사진 = 몽골인 말 훈련]

그리고 두 번째 대칸 오고타이 때 그 모양이 어느 정도 갖춰진 것으로 보면 된다. 특히 오고타이는 카라코룸을 건설한 뒤 수도로 통하는 교통과 정보 흐름이 원활해 질 수 있도록 중요지점에 역참을 설치했다. 그래서 오고타이는 자신의 중요한 치적 가운데 하나로 역참제를 들고 있다. 오고타이 때 만들어진 몽골비사에 역참제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참이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크게 활용된 것은 쿠빌라이 시대였다. 역참의 운용 방법과 관련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곳은 몽골의 사서가 아니라 바로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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