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80세로 타계한 쿠빌라이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
대칸 쿠빌라이는 지원 31년인 1294년 1월에 텡그리의 부름을 받고 타계했다.
80세의 고령으로 장수한 편이다. 그는 쿠데타로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오른 때부터 따지면 35년 동안 세계제국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었다. 대원제국 하면 곧바로 쿠빌라이를 떠올릴 정도로 대원제국은 그가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그 쿠빌라이의 자리는 손자 테무르에게 넘겨졌다. 이제 쿠빌라이가 일으켜 놓은 대원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그 것이 모든 사람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쿠빌라이는 어떤 상황에서 대원제국을 테무르에게 물려줬을까?
▶ 만년에 직면한 두 저항
[사진 = 몽골군 전투도]
노인황제 쿠빌라이는 만년에 크게 봐서 두 집단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 하나는 중앙아시아의 카이두(Khaidu)정권이다. 다른 하나는 만주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동방 3왕가(王家)의 저항이었다. 쿠빌라이는 이 두 개의 세력이 연합하기 전에 동방 3왕가의 반란은 자신의 손으로 제압했다. 하지만 카이두와의 전쟁은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 중앙아시아의 지배자 카이두
[사진 = 대몽골제국 통치령]
우선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에 대해 살펴보자. 쿠빌라이가 대원제국을 세우고 중국을 장악했지만 그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그의 손안에 완전하게 들어오지 않은 지역이 바로 중앙아시아였다. 그 지역과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는 칭기스칸이 둘째아들 차가타이에게 물려준 지역이다.
또 두 번째 대칸인 오고타이가 죽은 후 오고타이 일문은 차가타이 통치지역의 동쪽인 이밀강과 타르바가타이 산맥의 세습영지에 자리 잡았다. 쿠빌라이와의 대권경쟁에서 패배한 동생 아릭 부케의 잔류세력들도 역시 이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카이두는 바로 오고타이의 넷째 아들 카시의 큰아들이다. 그러니까 오고타이의 손자이자 쿠빌라이의 조카였다.
▶ 중국化 된 몽골에 반기
[사진 = 몽골군의 출정]
중앙아시아 지역에 사는 몽골인들과 위구르인을 비롯한 몽골化 된 투르크인들은 쿠빌라이를 올바른 몽골의 대칸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몽골의 전통과 생활방식에 충실하게 따르며 살아왔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중국화 돼 가는 쿠빌라이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쿠빌라이가 대칸이 아니라 중국의 천자(天子)처럼 변해 간다는 것이 반기(反旗)를 든 가장 큰 명분이었다.
"쿠빌라이는 유목국가 몽골을 한화(漢化)시키려는 역적이다. 쿠빌라이를 그냥 두면 거란족이나 여진족이 그랬던 것처럼 몽골도 중원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사진 = 중국박락 몽골 자치구 오보]
카이두의 이 같은 주장은 상당수 몽골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명분은 그랬지만 아마도 13세기 중반 이후 권력에서 멀어진 오고타이 가문을 부활시키려는 욕구가 더 컸을 것이다.
▶ ‘카이두의 나라’ 성립
카이두는 쿠빌라이에게 반감을 가진 세력들을 규합해 중앙아시아 지역에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쿠빌라이와의 대칸 경쟁에서 패배한 아릭 부케의 잔존 세력과 카이두의 영향력 권 아래 들어간 차가타이 일문이 포함 됐다. 이들의 연합체를 가리켜 역사는 ‘카이두의 나라’라 부른다.
[사진 = 준가르지역의 취재차]
그러니까 이 ‘카이두의 나라’는 중앙아시아를 하나로 묶은 최초의 몽골국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나라를 하나로 통합된 뒤 조직을 갖춘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이를 하나의 연합체로 된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그 지역은 지금의 몽골 알타이 지역 일대와 중국 신강성, 준가르지역, 일리지역, 카자흐스칸, 우즈베키스탄에 걸쳐 방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쿠빌라이가 동쪽의 진정한 대칸이라면 카이두는 중앙아시아의 실질적 칸으로 서로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 동방 3왕가와 카이두 연합 추구
페르시아의 훌레구 울루스, 즉 일한국은 쿠빌라이 편에 서있었다. 러시아의 킵차크한국도 쿠빌라이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두는 쿠빌라이 정권의 북동쪽을 맡고 있는 동방 3왕가와의 연합을 꾀했다. 동방 3왕가는 칭기스칸이 세 아우에게 준 땅이었다. 칭기스칸의 큰 아우 카사르와 둘째 아우 카치운, 막내 동생 옷치긴 후손들이 차지한 만주와 흥안령 일대가 바로 동방 3왕가의 땅이었다.
[사진 = 중앙아시아 사마르칸드]
당시 동방 3왕가에서는 쿠빌라이에 반발하는 기운이 자라나고 있었다. 카이두에게 이러한 움직임은 절호의 기회로 느껴졌을 것이 분명했다. 동서(東西)가 연합해 압박한다면 쿠빌라이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왔을 것이다. 반대로 쿠빌라이 측에서 보면 두 정권이 연합해 협공해 온다면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 = 대도성]
이를 사전에 차단하는 방법은 한쪽을 먼저 무너뜨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신속하게 행동을 취했다. 한 쪽을 묶어 놓고 다른 한쪽을 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카라코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남송 전투의 영웅 바얀이 카이두를 견제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놓은 다음 동방 3왕가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쿠빌라이 자신이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동방 3왕가에 대한 친정에 나섰다. 몽골족 내부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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