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완화가 필요한 곳은 모험자본으로 뛰어들 초대형 투자은행(IB)만이 아니다. 숙원인 파생상품시장 규제 완화를 비롯해 금투업 체력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돈줄이 마른 곳에 모험자본 공급자로 나설 수 있다.
◆이름뿐인 초대형 투자은행
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자기자본 4조원 이상인 증권사를 대상으로 초대형 IB로 인가해주고 있다. 은행만으로는 한계에 달한 기업금융을 살리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지금까지 초대형 IB로 지정한 5개 대형 증권사 가운데 발행어음업 인가를 받은 곳은 한국투자증권 1곳뿐이다. 나머지는 이름뿐인 초대형 IB다. 미래에셋대우와 NH투자증권, KB증권, 삼성증권은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비롯한 이유로 인가를 보류했거나 중단한 상태다.
바람직한 모험자본 공급은 초대형 IB에 리스크를 부담시키는 것이다. 은행이 과도한 위험을 떠안으면 금융시장 전반은 물론 국가 경제에도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증권사는 고객 예탁금과 예탁증서를 각각 한국증권금융과 한국예탁결제원에 맡긴다. 수탁기능을 안전한 유관기관에 넘기고 있다는 얘기다. 즉, 증권사가 무너져도 금융시스템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안동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증권사가 파산하더라도 은행과 비교하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차일피일 발행어음업 인가를 미루는 것은 새 정부가 추구하는 중소·벤처기업 육성책과도 맞지 않는다. 초대형 IB 5곳이 보유한 자기자본은 2017년 3분기 말 기준 24조7400억원에 달한다. 발행어음으로 자기자본 2배에 해당하는 49조4800억원을 모을 수 있다. 자본시장법은 여기서 50% 이상을 기업금융에 의무적으로 쓰도록 했다. 적어도 24조7000억원이 모험자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소·벤처기업 지원에 속도를 붙이려면 발행어음업 인가가 늘어나야 하는 이유다.
◆세계 1위 파생시장 몰락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금융투자산업은 번번이 밥그릇을 빼앗겨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파생상품시장에 대한 규제다. 파생상품시장은 차익거래와 헤지거래로 현물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파생상품이 지목됐다. 국내에서도 개인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규제가 강화됐다.
정부는 규제에 나서면서 옵션 매수전용계좌를 폐지했다. 거래승수와 기본예탁금을 올렸고, 30시간 사전교육이나 50시간 모의거래 의무화 같은 규제를 줄줄이 만들었다.
이러는 바람에 한때 거래량으로 전 세계 1위를 차지하던 우리 파생상품시장은 현재 10위권 밑으로 추락했다.
더욱이 과세당국도 파생상품시장을 위축시키고 있다. 파생상품 거래로 얻은 수익에 붙이는 세율을 5%에서 10%로 5%포인트 올리기로 했다. 가뜩이나 위축돼 있는 투자심리를 더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 당장 요구하는 것은 진입장벽 완화다. 최대 5000만원에 달하는 기본예탁금을 줄이거나 폐지하라는 것이다. 주가지수에 편중돼 있는 파생상품도 다양화해 매력을 키워야 한다.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선물시장이 현물시장을 흔드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 규제를 강화한 명분였지만, 지금은 파생상품시장 둔화가 현물시장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금투업 수익성을 갈수록 떨어뜨리면서 모험자본 공급자로 나서라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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