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력 완성’에 뒤이은 회심의 일격
강영진 초빙논설위원
새해 첫날 북한 김정은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통남봉미(通南封美)의 메시지를 한껏 담아 남북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한 달 전 화성15호 미사일이 워싱턴까지 날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뒤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을 때부터 가능성이 점쳐진 일이다. 예상된 일이라지만 여전히 회심의 일격인 것은 분명하다. 새해 벽두부터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각국 정부와 언론이 비상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북한의 핵 개발은 일종의 극약처방이다. 극단적으로 폐쇄적이고 인권침해적인, 그래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북한 체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이다. 고육지책이라지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까지 달리 대안을 찾지 못하고 밀어붙여왔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배척되고 제재당하는 ‘왕따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핵무력의 완성’ 선언은 북한이 ‘왕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면전환에 나설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준비한 회심의 일격을 새해 벽두에 선보인 것이다.
최소한 한 달 이상 치밀하게 준비한 수이기에 꽤 정합성을 가진 내용들이다. 현재 북한이 처한 상황을 나름대로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전략적 방향과 전술적 조치를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과거 어느 미 대통령보다 강력하게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이 실제로 ‘핵무력 완성’에 가까워져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을 상대로 당장 협상하자고 하는 건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 표명하기 전엔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은 이미 그 같은 입장을 입이 아프도록 강조해 왔다. 미국의 주문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김정은이 선택한 것이 바로 통남봉미다.
미국을 향해선 ‘핵단추가 내 책상 위에 있으니’ 군사적 도발(?)은 꿈도 꾸지 말라며 쐐기를 박고는 남한을 향해 ‘잘해 보자’고 추파를 던졌다. 진작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에 북한을 끌어들이려 공을 들여온 차제다. 여기에 김정은이 북한은 ‘공화국 건설 70돌 대경사를 기념’한다고 맞장구 치고 나선 것이다.
그렇지만 김정은의 맞장구는 조건부다. “지금처럼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는 속에서는 북과 남이 예정된 행사들을 성과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서로 마주 앉아 관계개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수도, 통일을 향해 곧바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중략)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 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들을 걷어치워야 합니다”라고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아무리 핵을 휘두르며 전쟁 도발 책동에 광분해도 이제는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 억제력 있는 한 어쩌지 못할 것이며 북과 남이 마음만 먹으며 능히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긴장을 완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김정은 신년사 부분 인용).
‘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의 손발을 묶었으니 남한이 미국을 의식하지 말고,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북한과 잘해 보자고 대놓고 주문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대립에서 협력으로 전환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개 천명한 끝에 올림픽 기간 중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하겠다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아예 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나아가 남한 사회에서 일정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친북세력’을 향해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 등 반미투쟁에 적극 나서라고 지침도 내놓았다. 그러면서 대표단을 파견하겠으니 시급히 만나자고 채근까지 하고 나섰다.
김정은의 한 수는 올 한 해 동북아 정세에 거듭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평창올림픽 기간 동안 잠정 중단한 한·미 군사연습이 재개된다면 그걸 핑계 삼아 핵무력의 ‘질적·양적 강화’에 나설 것이다. 김정은은 진작부터 신년사에서 “핵무기 연구 부문과 로케트 공업 부문에서는 이미 그 위력과 신뢰성이 확고히 담보된 핵탄두들과 탄도로케트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지시하고 있다.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예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이번에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의도를 감추거나 복선을 깔지도 않았다. 문제는 북한의 의도와 행보를 우리가 가진 전략적 목표, 즉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 나아가 통일기반의 조성에 걸맞도록 견인해내는 일이다. 북한의 속셈이 뻔해 보이니까 애당초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거꾸로 북한이 오랜만에 화해를 말했으니 앞뒤 잴 것 없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하책(下策)이다.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밝힌 내용은 최소한 1년 동안 북한의 행보를 예상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나아가 ‘핵무력의 완성’을 토대로 제시한 전략·전술임을 고려할 때 앞으로 북한이 장기적으로 취할 전략적 토대가 될 가능성도 커 보인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방안도 그런 관점에서 마련돼야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를 더욱 강하게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좀 느슨하게 풀어야 할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올 한 해 중단할 것인지 아니면 올림픽이 끝나면 곧바로 재개해야 할지 등등 치밀하게 점검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미동맹의 미래를 다시 점검하고 한반도 정세와 중국,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 정세도 구상해볼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북한이든 미국이든, 주변국 누구든, 나아가 국민들에게도 정부가 북한의 수에 허겁지겁 대응한다는 느낌을 주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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