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신과 함께, 신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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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열 초빙 논설위원·정보사회학 박사
입력 2018-01-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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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홍열 초빙 논설위원·정보사회학 박사]


영화 '신과 함께'가 누적 관객 1100만명을 넘어섰다. 예매가 계속되고 있어 최종 기록이 어디에서 끝날지 아직은 예측하기 힘들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1000만 관객은 넘었으니 흥행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좋은 영화를 결정하는 두 개의 기준인 흥행성과 예술성 중에서 일단 흥행성 면에서는 100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성이다. 예술성만 있으면 '신과 함께'는 최고의 영화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분류와 분류에 따른 평가는 지극히 작위적이다. 흥행성은 투자 대비 수익률로 환산될 수 있어 비교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지만 예술성은 사람마다 다르고 보는 관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술성 자체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흥행성이 뛰어난 작품, 다시 말해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는 그만큼 다양한 평가가 뒤따른다. '신과 함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여러 평가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영화의 예술성 여부가 아니라 신파성 스토리텔링에 관한 비판이다. 개봉과 동시에 이 영화는 ‘전형적인 신파’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얻었고, 이 이미지는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다. 영화 감상 후에 남긴 댓글 중 부정적 내용의 대부분은 신파와 관련된 것들이다. 보고 나니 신파, 최루, 눈물, 억지, 유치했다라는 댓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이런 평가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실제 이 영화의 큰 줄거리는 전통적 가족 시스템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파는 이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유독 이 영화 비판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신파로 따지자면 '7번방의 선물'이나 '국제시장'도 '신과 함께' 못지않게 영화 전개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아니 사실 많은 한국 영화가 신파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TV 드라마의 대부분은 극단적인 감정 자극을 위해 작위적 반전, 비논리적 전개, 권선징악형 결말 등을 일상적으로 도입한다. 시청자들은 TV 드라마의 허무맹랑한 전개에 이성적 비판을 하면서도 점차 드라마에 빠져들고 버림받은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렬한 희열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린다.

많은 사람들이 '신과 함께'에서 신파를 비판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이나 '국제시장'의 경우 처음부터 신파성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본다. 광고 카피나 포스터에 이미 충분히 그런 분위기가 반영돼 있다. 시대적·사회적 배경 역시 충분히 알고 있다. 현실 세계의 교도소가 배경이고 실향민의 막막한 삶과 그래도 살아야 하는 현실이 배경이다. 눈물과 감동이 당연히 존재하고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빠져들기 위해 영화관을 방문한다. 그러나 '신과 함께'를 처음 접할 때는 쉽게 신파성을 읽어낼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유명 웹툰에서 출발했고, 상대적으로 젊은 작가들의 영역인 웹툰과 신파성은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웹툰의 경쾌함을 원했다. 영화도 웹툰처럼 세련되고 미래지향적 내용으로 가득 차기를 바랐다. 영화 속에서 신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싶었고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어 했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환상적 분위기를 기대했고 '쥐라기 공원'에 나오는 상상 속의 세계를 보려고 했다. 남루한 현실 대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만든 가상현실에서 두 시간 동안 즐기고 싶었다. 이런 기대를 갖고 왔는데, 영화의 내용은 전형적인 눈물 짜기에 다름 아니다. 처음부터 예상했으면 당연히 받아들이겠지만 영화 도입부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스토리 전개와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시작했기에 사람들은 점점 영화에 몰입하게 되고 결말이 궁금해진 상태였다.

'신과 함께'에 대한 비난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기대와는 다른 결말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신기술과 현실 삶의 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인공지능, 생명복제, 가상공간 등이 영화 속 소재로 등장하면 그 영화의 결말은 세련된 미래사회이거나 또는 로봇이 지배하는 극단적 사회로 나타날 걸로 생각한다. 그런 사회는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구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지구상에 사는 세대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래에도 우리는 여전히 울고 웃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프고 상처받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빈부격차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계층, 계급, 인종, 종교, 지역에 따른 차별 역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계속 존재하고 영생에 대한 소망 역시 계속 존재한다. 기술 발전이 고도화돼도 유한한 인간들의 일상적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상이 좀 더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는 계속 존재한다.

'신과 함께'에서 과도한 신파성을 비난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신파성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신파가 없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파는 어느 시대에도 계속 존재한다. 물론 과도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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