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기술자 이근안 숨겨진 이력,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범인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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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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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 3월 사임

[사진 출처: JTBC 뉴스 동영상 캡처]고문기술자 이근안

영화 ‘1987’ 대히트를 계기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민주 인사들을 살인적으로 고문한 것 이외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미제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기도 했다.

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 1986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자 당시 내무부는 이근안을 화성경찰서로 발령해 범인을 잡게 했다.

하지만 반정부 민주 인사들을 잡고 살인적으로 고문하는 데에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검거하는 데에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2월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후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폭로가 줄을 이었고 결국 그는 1988년 3월 화성경찰서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경찰관직을 사퇴했다.

경찰이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고 이 사건이 영구미제사건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과학수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 자신의 머리카락을 남겼고 정액도 수집됐다. 지금이라면 범인은 즉시 체포돼 중형을 선고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살인 사건 수사는 탐문 정도에 의존했다.

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다. 바로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화성연쇄살인사건’ 등의 범인을 잡는 데 사용해야 할 경찰력을 반독재 민주 인사들을 잡고 살인적으로 고문하는 데에 대거 투입한 것.

역사의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당시 이근안이 그의 뛰어난 수사력을 민주 인사들을 잡고 살인적으로 고문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화성연쇄살인사건’ 등의 범인을 잡는 데만 사용했다면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은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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