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꿈이여, 멀리 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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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국제뉴스국 국장
입력 2018-01-1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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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해우당 일기]

 

[사진=김지영 초빙 논설위원(동양대 초빙교수 · 전 경향신문 편집인)]



꿈이여, 멀리 가다오


겨울이 깊어지면 무섬 마을은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관광 민박이 주업처럼 돼 늘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마을이지만, 한겨울에 접어들면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진다. 추위가 몰아칠 때는 대낮에도 밖에 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런 날 밤, 마을은 칠흑 같은 어둠에 소리 없이 묻히고 하늘의 달과 별만 더욱 창백하게 금속성 빛을 발한다.

물론, 눈이 내리는 날은 다르다. 물도리동 전통마을의 아름다운 설경을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겨울 동안 대개 마을사람들은 음식을 나누거나 바둑을 두면서 느릿느릿, 나지막하게 사는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외지의 자식들 걱정을 하면서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이러한 겨울 무섬의 적막한 서정이 나를 흡족하게 한다.

물론, 보일러 시설을 갖추지 않은 해우당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는 자취를 하며 무섬의 겨울을 나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번잡하게 변하기 전 옛 무섬마을의 정취가 희미하게 되살아난다.

또 지금 나는 평생 서울에서 벌인 생존의 여정과 나 자신의 타성에 대해 한 발짝 물러나서 다시 보고자 하는 중이다. 종착지도 아련하게 짐작해보면서 잊을 건 잊고, 줄일 건 줄이고, 버릴 건 버림으로써 영육 간에 더 간결하고 자유로워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러한 때, 추위와 불편, 외로움, 적막함은 내 존재를 더 멀리 독립적으로 데려가면서, 오히려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런데,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한밤중, 잠자는 나에게 가끔씩 나타나는 악몽들이 의식세계에 불연속선을 형성한다. 한동안 멀리 가버린 줄 알았던 두 가지 꿈, 그 꿈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시 한겨울 밤중에 무섬마을 해우당의 사랑채까지 나를 찾아온다.

첫 번째 꿈은 젊은 날 연거푸 대입시에 실패했던 방황과 좌절을, 두 번째 꿈은 안기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았던 억압과 이 일을 둘러싼 배신감을 각각 여실히 재생한 것이다. 어릴적 우리 집은 무척 부유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어린 마음은 정처없이 떠다니며 방황했다. 삶 자체도, 대학입시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던 나였지만 고교시절,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문학과 문예반 활동에 심취했다. 준비 없이 맞닥뜨렸던 전기 대학입시의 실패, 그리고 시작한 재수였지만 또 실패. 그 뒤 평생, 중요한 일을 앞둔 나에게는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당황하고 실패하는 꿈이 나타나곤 했다. 소스라쳐 꿈을 깨면 식은 땀이 흐르곤 했다.

두 번째 꿈은 경향신문의 ‘학원안정법’ 기사와 관련된 것이다. 1985년 7월 25일, 경향신문은 1면 톱기사로 ‘정부와 여당이 학원안정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의 특종을 게재했다. 당시 재야정치권과 대학가, 노동계의 반정부 투쟁이 갈수록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 법 시안은 시위학생들에 대해 영장 없이 바로 체포 및 구금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 선도교육을 위해 준사법기관인 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하며 지도교수에게도 연좌제로 책임을 묻는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이 법 시안의 내용은 사회부 후배(김현섭)가 취재했다. 정치부 소속으로 총리실에 출입하고 있던 나는 그날 아침 노신영 총리와 노태우 민정당 대표, 장세동 안기부장 등 6인이 참석한 고위 당정회의가 안가에서 열려 처음으로 이 시안을 논의했다는 내용을 취재해 송고했다. 그러나 당시 석간이었던 경향신문 초판이 나온 직후, 손광식 편집국장 등 선배 4명과 함께 안기부에 연행돼 갔던 나는 이틀간의 고문폭행으로 피투성이가 됐다. 연행된 5명 중에서도 특히 나는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 

이 법안은 야당과 학원가의 강력한 반발로 취소됐지만, 정당하게 취재한 기자에 대해 영장도 없이 체포·구금하고 고문을 하는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런데 일부 동료의 언행은 정권의 야만성보다 더 나를 절망케 했다. 회사로 복귀한 뒤 정치부 내에선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는커녕, 평소 매일처럼 하던 점심이나 저녁 모임조차 하길 꺼리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거길 뭣하러 갔다 온 거냐”며 비아냥거리는 동료마저 있었다. 이 모두 독재정권의 눈길을 지나치게 의식한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그 뒤 내가 초대 경향신문 노조의 집행부로 일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기자생활, 사회생활을 그런대로 정상적으로 해오면서 나는 젊은 날의 방황과 좌절을 잊은 줄 알았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또 안기부 지하실의 고문 가해자와 배신자와 같던 동료들도 이미 마음으로 용서를 했다.

그래도 때만 되면 꿈으로 나타났던 일들. 한세상 살아버린 이제는 정말로, 시간의 저 깊은 지층 속에서 모두 삭아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꿈들은 생생하게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말년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듯이, 그리고 한없이 나약하다는 듯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나를 비웃는다.

잊는다고, 용서한다고 해원(解冤)이 되는 게 아니었다. 검게 착색된 영혼의 상흔을 치유하기에 망각과 용서는 너무 소극적인 해법인지.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와 수행, 공덕쌓기에 온 몸을 바치기도 하는 것인지.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적막한 산골 강마을, 칠흑 같은 한밤중 을씨년스럽게 넓은 고가에서 혼자 잠자는 초로의 사나이가 식은 땀을 흘린다, 비명을 지른다. 

꿈이여, 제발 멀리 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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