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탐구]부동산정책 쓴소리맨 선대인, 차라리 행정 총대 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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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용 기자
입력 2018-01-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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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시역할 하던 그가, 문제를 풀기 위해 정치 속으로 들어가겠다는데 ... '선띨', 6월 단체장 선거에 명함 내미는 사연

[사진=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화요일 4시 텅 빈 경복궁 경내에 흰 눈이 펑펑 쏟아졌다. 광화문을 지나 신무문을 통과하면 청와대다. 겨울이 지나도 ‘흰’ 것들을 계속 만나게 될 전망이다. 지난해 5월 대선 때 던졌던 그 흰 것. 투표용지 말이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6월 4일(수)에 실시된다. 시장, 도지사, 의원 등 지방 살림 책임자 3952명을 뽑는다. 개헌국민투표논의도 오가고 있다.

선대인(선대인경제연구소 대표) 소장도 그날을 긴장감 속에 기다리는 사람 중의 하나다. 최근 용인시장 출마의사를 표명해온 선소장. 9일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비판적인 논객이다. ‘선대인 미친 부동산을 말하다’ 등 12권의 책을 낸 작가다. 과거 기자, 비서관 등을 지냈다. ‘나는 꼽사리다 시즌 3’ 팟캐스트 진행자로도 활동 중이다. “(박근혜 정부의 빚내서 집 사란 정책은)정신 나간 정책” 등 독설도 가리지 않는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지금껏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는 그는 “8월부터 거의 쉬지 못했다”고 했다. 이쯤 되면 '말하기'도 힘겨운 노동이다. 채 3분도 안 되어 꿀차가 담긴 종이컵의 바닥이 희멀건히 드러났다. 선대인 소장은 2002년까지 6년간 동아일보에서, 2004년부터 일 년 반 동안 미디어 다음에서 약 7년 반 동안 기자 생활을 했던 언론인이기도 하다.


◆왜 정치인가

“투사의 이미지가 있지 않냐”고 질문을 던졌다. 선대인 소장은 기자로서, 시민으로서 ‘대항 권력'의 총대를 메고 권력을 비판해왔다. 용인시장은 감시받아야 할 ‘권력’이다. 그가 비판하던 그 자리로 가려고 출사표를 던진 셈이다. 일각에서는 당연히 우려를 표한다. 또 선거철마다 언론인의 정계 진출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선 소장의 생각을 물었다. 선 소장은 “저는 이미 언론을 떠난지 오래되었어요. 연구인이나 저자로서 제 주장이나 지향을 뚜렷하게 했던 사람이 그 가치와 지향을 목소리와 활자로 주장하는 걸 넘어서 실제로 생활 정치의 무대에서 실현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선 소장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공부도 공공정책을 했고 건전하고 지속할 수 있는 경제구조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사람이 실행에 옮기는 건 바람직한 거 아닌가요”라며 “그 영역에서 발전시킬 수도 있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실현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선 소장은 2007년 약 1년 동안 오세훈 서울시장 비서관으로 근무했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시절 각종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왔다. 정치권의 러브콜도 있었다.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인 시장 출마를 택한 이유를 물었다. 선 소장은 “전제가 자꾸 정치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정치한다’가 아니다”며 “자리를 차지해 권력을 쥐겠다는 게 아니라 지역에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풀려면 용인시장이라는 권한이 필요하니 그래서 도전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용인시장 후보는 15명 내외다. 현 용인시장은 자유한국당의 정창민 시장이다. 떨어지면 어떻게 할지 물었다. 선 소장은 “저는 떨어지면 다시 4년 후(용인시장직)를 준비할 것 같아요”라며 “문제를 풀기위해 (시장직에) 도전하는거지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하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답했다. 2년 후 총선출마 의사를 물었다. “지역에서는 총선에도 나가보라고 이야기도 하시는데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총선에 나갈 거였으면 2016년 총선에 나갔어야 했다"면서, "사실 민주당에서 당시에 영입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무소속으로 출마할 건지 물었다. 그는 “더불어 민주당으로 정했다”며 “2003년 열린 우리당 시절부터 당원이었어요 당 소속 여부는(그동안) 안 밝혔죠”라고 답했다.


◆ 7개의 직업을 가졌던 사나이

선 소장은 비서관으로는 1년, 기자, 연구원, 작가 등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을 택했다. 경제학자라고 말하자 ‘연구자’라고 정정해 달라고 했다. 김광수경제연구소를 나와 자신의 이름을 건 연구소를 차리기도 했다. 비서관 시절 자신이 모셨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관련 발언("무상급식은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을 비판해 화제가 됐다. "무상급식에 쓸 예산은 충분한데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받아친 것. 선 소장은 “옳고그름을 가리는데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일각에서는 공무원, 정부 부처에서의 조직 생활이 안 맞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그는 “저는 리버럴한 사람이 맞지만 제멋대로 한다는 게 아니다"면서 "시기마다 책임감을 느끼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 한다”고 말했다.

선 소장은 “저는 글 쓰는 사람이란 정체성이 늘 있다고 생각해요”고 말했다. 저술한 것들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뭔지 물었다. “심혈을 기울였지만 제일 안 팔린 책 두 권이 있어요. 시대를 너무 앞서서 나와 그랬는지...” 그가 말한 책은 세금 문제를 다룬 ‘프리라이더’, ‘세금혁명’이었다. 기자가 “10쇄가 넘는 책이 꽤 많더라”고 하자, “3만 부 이상 팔린 책이 8권정도 되요. 저 책들만 1만부 정도였죠”라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살짝 기분이 안 좋아요?”라고 물었다. 쏟아낸 자랑에 대한 나름의 조크였다. 용인시장 선거에 도전했던 체험기(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인 셈이다)를 기획 중이라고 했다.


◆아빠의 정치

선 소장은 부산에서 태어나 경북 경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귀국 후 일산에서 살다가 2011년 양평으로 옮긴 뒤 2014년부터 용인에서 살고 있다. 선대인연구소의 주소지는 지난 11월 강남에서 용인으로 옮겼다.  왜 출신지나 이전 거주지였던 양평이 아니라 ‘용인’에서 출마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일단 이전에는 정치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참여는 했지만, 정치적 리더가 되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선 소장은 처음에는 지역 문제가 아닌 단순히 ‘내 아이의 문제’로 바라보았다. 그는 “(일산에 초등학교에서)쉬는 시간에도 화장실을 마음대로 못 가게 했다는 거예요” 아이들 이야기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잠시 기침을 했다. 그는 “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서 양평의 시골 초등학교로 옮겼다”고 말했다. 그는 “양평에서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중학교가 없어서 대안학교에서 출발한 이우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이후 용인으로 집을 옮겼다.

“용인에 오면서 직접적으로 문제들과 마주쳤어요. 작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주변이 들판인데 3000세대가 들어서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거죠. 저희 집 앞. 우리 아이 학교 앞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었어요. 용인시 곳곳에서 융단 폭격하듯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더라고요."

선대인 소장에게는 '부동산 폭락 주의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용인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분양 물량이 쏟아지고 있는 도시다. 그가 아파트가격에 대해 전망한 것이 용인시의 아빠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선 소장은 “부동산 폭락론자는 부정적인 프레임이다. 무리하게 빚내서 집을 사지 말라는 주장이었는데, 부동산업계에서 내 말의 뜻을 과장하고 왜곡했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에서 투기를 조장하고 가계부채를 극단적으로 늘려버렸으니깐.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누군가는 경고해야 하지 않겠어요. 과소비를 하면 긴축을 해야 하잖아요. 부동산 과소비 이후에는 긴축의 시기가 온다고 생각해요. 시기의 문제지 반전의 상황이 올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봐요.”

부동산경기도 용인 지역 경제의 한축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인위적으로 집값을 떠받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도시가 되면 집값이 설마 떨어지겠어요? 빈 땅만 보이면 아파트를 꽂는 난개발을 하지 말고 하더라도 체계적인 도시 계획 하에 개발해야죠. 집값을 올리고 내리는 건 공공의 할 일이 아니란 거예요. 주거 가치가 높아져서 집값이 높아지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부동산 가치는 이용가치가 있고 (시세차익을 겨냥한) 투자가치가 있는데, 일부 사람들이 투자차익을 차지하도록 정책을 펼치는 게 정부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 리영희와 김대중이 롤모델... 이젠 포스트DJ를 꿈꾸다

언론계는 선대인 소장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지대다. “동아일보에 있으면서 고민과 갈등을 많이 했어요. 보수로 변질해서 싫었던 게 아니다. 언론의 본령을 지키지 않는 언론이 돼버려서 싫었지요." 그의 언론계 롤모델은 고 리영희대기자라고 했다. 정치계의 롤모델을 물었다. 그는 “여러 본받을 분들이 많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새긴다”고 말했다. “그분은 정치인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죠. 백면서생처럼 실행과정에서 원칙만 주장해서는 한계가 있고요. 용인 지역사회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계 안에서 최대한 그 문제의식에 준하는 현실적 해법을 찾아야 하는거죠."

선 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 시기(1998-2003) 상당 기간을 동아일보기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중앙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이루어졌다. 빅3로 불리던 조선, 중아, 동아일보는 이를 `언론사 타격과 탄압'으로 보았다.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였던 성한용 한겨레 기자는 저서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의 배경이 정권과 언론의 ‘결별’로 보았다. 선 소장은 “(세무조사 시기)정치부 말진 기자로 있었다”며 “제가 동아일보의 기자가 아니라 회사원으로서 조직원으로서 최전방 소총수 역할을 저한테 맡긴 거죠”라고 말한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할 때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다. 일주일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르포기사를 썼다. 외환위기의 고통 속에서 노숙자로 전락한 이들의 실태를 전했다. 첫 날 보도가 나간 뒤 경영진이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기사다’라는 지적을 했다고 한다. 이튿날 후속 기사를 쓰려고 하는데 “5월 농번기에 농촌일손이 모자라는데 서울역 앞에서는 무료급식 받으며 술판만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식으로 내용을 바꾸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와 당황한 기억이 있다.  “편집부에서 제가 쓰지도 않은 내용을 제목으로 뽑아 놓기도 했죠. 당시 마음이 되게 아팠죠.”

동아일보를 나가기 한해 전인 2001년 아이가 생겼다. 그는“10년만 지나면 글을 읽고 아빠 기사를 찾아볼 텐데 그때 지금 내가 쓴 기사가 그 아이한테 떳떳한 수 있을까 아 그때(정치부 기자 시절) 그럴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속에 사표를 썼다”고 말했다. 마지막을 국제부에서 6개월 보낸 뒤 진짜 사표를 썼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뒤 2년여간의 공백에 관해 물었다. ”사실 힘든 과정이었죠, 애 엄마한테 많이 미안했던 시기이기도하고 (중략) 저 때문에 애 엄마가 애까지 태어난 상황에서 옷가게를 했고... 그때 한 1년 가까이 아무 적을 두지 않고 유학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들이 많이 실망도 하고 속도 많이 상하셨던 것 같아요. 흔히 그분들 표현으로는 아니 멀쩡하게 남들이 다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백수생활을 하고 있으니 보시기에는 많이 답답해하셨겠죠." 그는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는 경복궁이 보이는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5분거리에 동아일보가 있다.

선 소장은 분투 끝에 하버드대 입학허가서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미디어 다음에서 연락이 왔다. 선 소장은 “그때 취재팀이 있었고 프리랜서로 일해보지 않겠냐”했다며 “몇 개월만 일하고 가려다가 한해 입학을 연기하고 일 년 반 정도를 일하다 갔죠”라고 말했다.

선 소장의 목소리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그는 “그때의 경험이 되게 좋았어요”라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동아일보처럼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쓰면 다음 톱에 바로 걸리는 거예요. 얼마나 기자로서 신나요. 아무도 간섭을 안 하는 데 공 들여 잘 쓰면 다음 톱에 오르고 영향력이 막강해지잖아요. 신났죠”라고 말했다.

선 소장은 “(퇴사 후 2년간) 그 당시에 참 힘들긴 했어요”라며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지금 나와서 웬만한 기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저는 그런 가치가 중요하고 생각합니다.”

 

[사진=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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