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추구는 인민의 권리이며, 인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당과 정부의 책임이다. 인민의 행복을 당과 정부가 내리는 은총이라는 인식의 착오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왕양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왕양(汪洋)은 17세까지 똥지게를 졌다. '중국7룡' 중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출신은 왕양 단 한명 뿐. 혁명 열사나 고관대작의 자제는 아님은 물론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고위간부 출신도 아니다. 경제중심도시 상하이 태생이거나, 근무경력자도 아니다. 이렇다 할 학벌도 없고, 시진핑의 고향 시안과 연고도 없다. 왕양의 출발점은 ‘0’에 가깝다. 이런 그의 출세비결은 뭘까?
왕양은 1955년 3월 안후이성 북부 쑤저우(宿州)의 근교 농촌마을에서 식품공장 직원 아버지와 담배가게 점원 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양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독학을 좋아하며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탐구심이 강한 ‘시골영재’였다. 그 시절 대다수의 농촌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치면 곧장 일터로 투입됐던 것과 달리 왕양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균빈(均貧)의 시대'였기에.
중학 중퇴 농촌소년 왕양에게 배분된 주된 업무는 마을 집집마다 뒷간에서 인분을 퍼 담아 똥장군을 지게에 지고 언덕배기를 넘어 있는 인민공사 소속 밭에 뿌리는 일이었다.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인 1972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가 다니던 식품공장 직원으로 전속 배치됐다.
1976년 식품공장 작업장 조장으로 승진한 만 21세 왕양에게 드디어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문화혁명기의 지방 당간부 재교육 훈련기관인 ‘57’간부학교의 교사로 선발된 것이다. 제아무리 당시 중국사회가 고학력자가 드문 저학력 사회였다 하더라도 중학교 중퇴학력자가 당간부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다니. 이렇다 할 배경이 없는 왕양 본인의 능력이 출중했으리라고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탁월한 교육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연구실 부주임, 학교 당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한 왕양은 1979년 베이징의 중앙당교 이론선전 간부학습반(2년제 초급대학과정) 파견 교육을 받게 되는 ‘인생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차세대 간부 양성 정책의 일환이었다.
안후이성로 돌아온 1981년 26세의 왕양에게 공청단 쑤현 지역 당위원회 부서기직이 주어졌다. 이어 안후이성 공청단 선전부부장, 부서기를 역임한 1984년 29세의 왕양은 공청단을 떠나야만 했다. 공청단원의 정년 만 28세를 넘겼기 때문이다.
잠깐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 가지가 있다.
국내 외신에서 왕양을 후진타오(胡錦濤)계의 공청단파(共靑團派)로 재단하는 대목이다. 이는 모든 중국정계 인사변동을 파벌간 권력투쟁으로 읽으려는 일본과 홍콩의 일부 매체가 주조해 낸 ‘픽션’ 내지 ‘팩션’이다.
공청단은 중국 공산당의 예하 청년조직이다. 2014년말 현재 공청단원의 수는 약 8822만명으로 고등학교 졸업생이면 거의 대부분 공청단에 가입하고 있다.
공청단의 가입 조건은 다음과 같다. 만 14세 이상 28세 이하의 중국 청년으로, 공청단의 장정(章程, 규정)을 승인하고, 공청단 조직에 참가해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며, 공청단의 결의를 집행하고 단비를 납부할 경우, 공청단 가입을 신청할 수 있다. 28세가 되면 단내의 직무를 맡을 수 없고, 단을 떠날 절차를 밟는다. 단, 성(省)급 이상의 공청단 제1서기의 정년은 39세, 전국 공청단 제1서기는 44세이다.
이를테면 공청단 전국 제1서기 출신인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모두 43세에, 상하이시 공청단 서기를 역임한 한정(韓正) 현 정치국 상무위원은 38세에 공청단을 탈퇴했다.
따라서 고졸 이상이면 누구나 가입하는 공청단이고, 정치국원 비롯 대다수 현직 당간부가 공청단 경력자인 상황에서 지방 공청단 초급간부 2~3년 일천한 경력의 왕양을 '공청단파'로 분류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 오브 난센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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