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수도권 시민의 안식처, 청계산
[사진 = 청계산]
남북으로 흐르는 능선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청계산(淸溪山)은 산세가 수려하다. 이 산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김포시의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산 가운데 하나다. 경기도 안양과 의왕, 과천, 서울 양재동에 이르는 이 산은 경기 중남부지역과 서울 시민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사진 = 청계산 등산로]
그래서 이 산은 주말이면 가벼운 등산을 위해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바위가 별로 없는 대신 비교적 산행길이 평탄해서 특히 가족단위 등산객들이 많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올라가서 이수봉과 국사봉을 거쳐 양재동 옛 골로 내려오는 산행을 한다. 이 대중적인 코스와 함께 청계산 등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코스가 바로 청계사 산행로다.
[사진 = 청계사]
청계사(淸溪寺)는 이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국사봉(國思峰)을 마주보며 전후좌우에 산줄기를 거느린 곳,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는 요지에 이 절은 터를 잡았다.
▶ 평양 조씨 문중과 인연 깊은 청계산
[사진 = 청계사]
고색창연한 모습을 지닌 이 사찰은 원래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지만 사비를 들여 재건한 것은 바로 고려 충선왕의 장인었던 조인규였다. 그래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져서도 청계산과 청계사에 대한 평양 조씨 문중의 영향력은 이어져 왔다.
[사진 = 국사봉 표지판]
특히 조인규의 후손으로서 정조의 측근 무인이었던 조심태(趙心泰)가 청계사를 사도세자의 원찰(願刹), 즉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주선하면서 정조 시대에 더욱 비중 있는 사찰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사봉도 고려 말 조씨 문중의 조윤(趙胤)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며 이 봉우리에 올라 고려를 생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 = 청계사 표지판]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형에게 평양 조씨 가문은 고려와 존망을 같이할 집안이라고 울면서 호소하며 반란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형은 동생을 영남안찰사로 보냈는데, 송도로 돌아오기도 전에 고려가 망하자 조윤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청계산에 들어가 송도 쪽을 바라보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조윤은 이름마저 조견(趙狷)으로 바꾸고 처음에는 청계산 나중에는 청량산(淸凉山)산속에서 지내며 여생을 마쳤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자손들에게 조선조정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조선에 항거한 조윤과 같은 이들의 행동 때문에 지명의 의미가 바뀌기도 했다.
[사진 = 망경대 표지판]
주봉인 망경대는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절경이어서 望景臺로 불렀는데 고려의 충신들이 이곳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고 해서 望京臺로 바뀌었다. 또 다른 지방의 국사봉은 國士峰 또는 國師峰이라고 쓰는데 나라를 생각한다는 의미를 붙여 청계산만 생각 思를 붙여 國思峰이라 부른다. 이처럼 청계산은 평양 조씨 문중과 깊은 인연을 지닌 산이다.
▶ 역관(譯官)에서 국구(國舅)로 신분 상승
[사진 = 조인규 관련 고려사]
조인규는 평양 조씨 가문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다.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면서 국구(國舅)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조인규가 최고의 권세가로 부상하게 된 경위를 보면 역시 몽골의 지배라는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필요했던 시절에 역관으로 발을 딛었던 것이 미천한 가문을 일약 권문세가로 부상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몽골 말에 능통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30여 차례나 대도를 다녀오면서 몽골에 많은 친분관계를 만든 것은 물론 대칸인 쿠빌라이로부터도 인정받을 정도가 됐다. 조인규의 예를 보면 요즘 일고 있는 영어 배우기 열풍만큼이나 당시 고려에는 몽골어를 배우려는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인규가 통역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충렬왕이 중서성에 보낸 서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나의 신하 조인규는 몽골어와 한어를 통달해 조정에서 보내오는 조서와 칙서 등의 내용을 조금도 틀림없이 번역해 내며 언제나 존엄성 있고 부지런하니 청컨대 그에게 탈탈화손(脫脫禾孫:원나라 중요 통역관) 겸 추고관두목(推考官頭目)으로 임명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해 원나라는 조인규를 탈탈화손으로 삼고 금패를 내려주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것을 보면 조인규는 사람 됨됨이가 장중하고 친화력이 높았던 것 같다.
▶ 쿠빌라이로부터 인정받은 역관
"조인규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아름다웠고 말과 웃음은 적었으며 전기를 많이 읽었다. 원나라 사신 한사람이 고려에 감정을 품고 고려의 고유한 풍습을 바꾸려고 황제(쿠빌라이)에게 제소했는데 일이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조인규가 혼자 들어가 쿠빌라이를 뵙고 명확하게 시비를 가려 말했기 때문에 이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북 지방이 고려로 되돌아오게 된 것도 조인규가 황제에게 사정을 잘 말한 공로이다."
(고려사105 열전18 조인규)
[사진 = 고려후기 여인상]
조인규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정받는 만큼 그의 지위도 상승해 1292년에는 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국구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까 충선왕이 몽골공주와 결혼하기 전 이미 조비(趙妃)는 세자비로 간택돼 있었던 것이다.
▶ 몽골로 소환된 충선왕
[사진 = 조비관련 고려사]
조비에 대해 설명하는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인이 여덟 명이나 되고 여성 편력이 만만치 않았던 충선왕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라면 아름답고 총명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비무고사건은 다분히 反개혁 세력과 몽골공주의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진 합작품이다. 충선왕의 反몽골적인 개혁정치를 마땅치 않게 보고 있던 몽골황실은 몽골 공주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자 즉시 충선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충렬왕을 다시 왕의 자리에 올렸다. 왕위에서 밀려난 충선왕은 측근 사십 여명도 함께 중국 땅으로 소환 당했다. 안서(安西)땅으로 유배 보내졌던 조인규는 6년 후에 풀려나서 고려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충렬왕은 원나라 성종의 지시에 따라 조인규를 판도첨의사사사(判都僉議使司事)로 임명했다. 부모에 뒤이어 원나라 대도로 압송됐던 조비는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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