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흥 인하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 ‘월간 인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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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서 기자
입력 2018-01-1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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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학으로 고지도 분석

최규흥 인하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가 수학으로 우리나라 고지도를 분석한 내용으로 논문을 발표, ‘월간 인물’ 1월 호에 연구 내용을 소개했다.

최규흥 명예교수는 정택선 군산대학교 수학과 교수와 함께 ‘위상수학을 활용하여 고지도 분석과 고려 서경 평양 위치 확인’을 주제로 공동 연구를 진행해 최근 그 연구 결과로 논문 ‘위상수학 교육과 묘청의 고지도 분석에의 응용, 교육문화 연구, Vol. 23, 271~296’를 발표했다.

최교수는 “고려는 압록강 이남의 조그만 영토를 가졌던 소국이라고 인지해 왔다. 그런데 2017년 8월 6일 묘청의 서경 평양성 고지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이 고지도의 둘레에 흐르는 강을 북한 평양의 대동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지도가 나타내는 지역은 북한 평양이 아니고 지도가 가리키는 지역은 요양시 궁장령구라는 것을 이번 논문에서 중명했다”고 말했다.
 

고려 태조 왕건(920년 대) 황제 때 서경 평양부 지도[사진=인하대]


최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고려 초 평양부 고지도 등 평양과 관련된 고지도들를 분석하고 이 고지도들이 나타내는 지역이 북한 평양이 아님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들 고지도 모두가 요양시 궁장령구라는 사실도 구글 지도에서 강과 지류, 섬들을 비교하며 일대일 대응을 시키면서 확인했다.

먼저 각 지도에 나타나 있는 대동강 물의 영역을 몇 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섬의 개수를 제거한 평면 도형들을 위상수학의 종수(genus)라는 개념을 사용해 고지도의 영역과 현재의 북한 평양의 구글 지도를 비교하여 고지도가 나타내는 지역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는 증명하였다. 고지도가 나타내는 대동강과 그 지류, 지류의 지류에 번호를 붙이고 궁장령구의 지도에도 똑같이 번호를 붙이고 일대일 대응시켰다.

최 교수는 “묘청의 서경 평양성 고지도에 나와 있는 평양의 고지도나 평양부의 고지도는 모두 북한 평양이 아니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구글지도 참조). 고려시대 평양성이나 평양부의 모습이 담긴 고지도들를 분석해보면 이 지도들은 모두 요양시 동쪽 끝 지역과 본계시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고려조 서경 평양의 핵심지역은 태자하와 한하, 탕하가 둘러싸고 있는 현재 요령성 요양시 궁장령구이다. 평양부 고지도는 북한 평양 지도와 강과 지류를 일대일 대응시킬 수가 없다. 또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달리 고려는 고구려의 영토를 통치했던 매우 큰 영토를 통치했던 나라였다는 사실도 정인지의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에 고지도가 6000여 점이 있다. 최 교수는 이번 고지도 분석 연구를 시작으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고지도들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강역들을 도형으로 규명하여 후손들에게 우리 선조들의 빛나는 역사를 알려 주려 하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최 교수는 “고지도들은 현대식 지도가 아니다. 강, 산, 섬과 주요 지역의 위치를 상호 위상적으로 그려 놓아 현대식 지도 이해를 적용시키려 하면 안 된다. 우리는 고지도를 분석하는데 위상수학과 수리적 논리를 적용하면 상당히 많은 결과들을 얻을 것이다. 잘 못 알려진 역사를 수정하는데도 역할을 할 것이다”고 말했다.

◆답사 일기
요양시 궁장령구를 답사하기 위하여 2017년 11월 9일 오후 2시쯤 安平에 도착하여 11월 11일까지 궁장령구를 답사하였다. 11월 9일 세종대왕 이후 이 지역을 고려 서경 평양성이라고 인지하고 찾아온 조선인 또는 한국인은 저자가 처음이라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이 지역에 사는 고려인 후손들을 제외함).

▶답사 제1일
11월 9일 安平의 한 호텔에 짐을 풀고 오후 3시 답사에 나섰다. 택시를 타고 南沙村을 지나 太子河 남쪽 강가에서 내려 太子河 남쪽 길을 따라 따라 참와수고 유람선 매표소로 가면서 오른쪽 산 위를 올려다보니 망대라고 추측되는 것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있었다. 망대에서 태자하 북쪽의 적들의 동태를 바라보면 아주 잘 보이도록 되었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표를 안판지가 오래되었고 조그만 매표소 박스는 낡아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참와수고 하류 제방 둑에서 사진을 찍었다.

제방 둑의 높이는 100m 쯤 돼 보였다. 1971년도에 참와수고를 소개하는 안내문과 궁장령구 지도를 보니 그때 湯河의 옛 명칭은 鴻河이었고 寒河의 옛 명칭은 란하(蘭河)이었다. 산 언더에 올라 참와수고를 바라보니 망망 대해이었다. 곧 어둑어둑해지며 가랑비가 와서 답사를 마치고 호탤로 돌아왔다.

 



▶ 답사 제2일
11월 10일 安平의 호텔에서 8시에 서쪽으로 걸어가서 湯河를 건넜다. 탕하의 강폭은 200m가 넘어보였다. 강바닥을 다듬는 공사를 하여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탕하 서쪽길을 따라 1Km 남짓 북쪽으로가서 다시 탕하를 건너 안평 번화가로 들어갔다. 탕하 서쪽길을 달리면서 鴻河가 붙은 가게 간판을 두 개 보았다.

택시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그 동네를 구경하고 택시를 타고 大瓦地로 갔다. 大瓦地에 내려서 큰 기와 무더기나 궁궐터를 찾을 수 있을까 하였으나 큰 기와 무더기나 궁궐터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도 없었다.

택시 기사가 좀 더 산위로 올라가면 大瓦寺가 있다고 하여 산위로 한 1Km 쯤 더 올라 갔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九龍宮이었다. 여기가 九梯宮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圓通寶殿이 눈에 들어왔다. 원통보전 양쪽에는 3개씩 6개의 비문 석물이 있었다. 그 중 4개는 돌이 깨끗하고 비문도 깨끗해 석물을 세운지 10년도 안 돼 보였다.

그런데 양쪽에 오래된 석물이 하나씩 있고 아마도 천년은 돼 보이지만 그 돌에 새겨진 돌의 글월 내용은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아마도 그 글월 내용이 여기가 ‘九梯宮이고 구제궁을 高麗 太祖 王建이 세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생각만 할 뿐 그 글월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구룡궁에서 나와 높은 여러 계단 위 天王殿에 올라갔다. 천왕전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큰 돌에 禪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돌이 조천석이 아니가 생각해보았다. 이 돌의 동쪽에는 大雄寶殿이 있다. 양쪽에 여러 개의 전각들이 있고 여기저기 공사를 하며 새로 단장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고려 임금이 서경에 오면 항상 들리는 永明寺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절의 이름은 大瓦寺가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절 구경을 마치고 태자하 쪽으로 내려올 때는 올라 갈 때와 다른 길로 내려왔다. 내려올 때 한 농가 마을의 農家院 식당을 만나 혹시 점심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들어가 보려 하니 닫혀 있었다. 주변에 농가 주택들이 빈집도 꽤 보이고 외딴 집들은 폐가 되어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태자하 남로에 다달았다.

다리를 건너 태자하 북쪽의 北沙村으로 갔다. 북사촌에서 장궁령구를 바라보니 강가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람이 그 절벽들을 감히 올라 갈 수가 없어 보인다. 절벽위 산꼭대기에 사람들이 올라가기 어려운 곳에는 성벽을 쌓았던 돌성의 흔적이 보인다.
北沙村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 주인집 택시를 타고 龍佛殿으로 갔다.

용불전은 임금만이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불공을 올리는 궁궐안의 조그마한 궁전이라고 생각한다. 龍佛殿 좌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風調雨順民安樂(풍조우순민안락):
바람은 조화롭게 불고 비는 순조롭게 내리고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소서.
海晏河淸世太平(해안하청세태평):
바다는 편안하고 강물은 맑고 깨끗하고 세상을 태평하게 하소서.

용불전 오른쪽에는 큰 궁전처럼 보이는 三聖殿이 있다. 한단 위에 天王殿이 그밖에 여러 개의 전(殿)이 있었다. 사찰은 새로 단장하는 중이였고 새로 만든 비석에는 깨끗하게 비문들을 써 놓았다. 하지만 오백년 천년 된 비석들은 뒤집혀 있어 그 뒷면에 어떤 내용의 글귀가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사찰을 모두 둘러보고 나오면서 여기가 고려 서경 평양성의 대화전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평평한 지대에 전답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말 목장을 하면 수천 마리의 말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이곳이 고려 인종대왕 때 대화전을 짓기 전의 林原驛이 아니었던가 추측해 보았다.

 



그 다음으로 東雙廟村으로 가서 雙廟(두기의 왕릉)를 찾아보려 했으나 없었고 그 자리에 시골 삼점(超市)이 있어 그 상점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먹고 주인과 쌍묘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쌍묘는 1968년 홍위병들이 모두 때려 부수었고 석물들은 상점 앞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 넣고 모두 묻어 버렸다고 하였다. 묘자리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게 안 좋다고 남들이 말해서 기분이 안 좋았지만 그냥 집 짓고 산다고 했다. 우리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서 길림에서 왔다고 답했다. 西雙廟村에도 묘는 1968년에 모두 때려 부수고 없다고 말했다.

대화를 마치고 나와서 三輪車를 타고 서쌍묘촌으로 가서 廟자리가 있었던 곳에 개인 집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집 주인이 대문으로 나오는 모습을 사진만 찍고 주인과 대화는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 다음으로 松泉寺村로 가서 송천사를 찾아 보려 했으나 모두 집들이 있어 절터가 어디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숙소 쪽으로 돌아오면서 택시를 탓는데 그 택시 기사가 궁장령구에 環城路가 있고 外環路가 있다고 말하였다.

▶답사 제3일
11월 11일 安平의 호텔에서 8시에 나와 택시를 4시간 동안 180元에 대전하기로 하고 後廟를 찾아 갔다. 하지만 廟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 아주머니를 만나 後廟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으나 모른다고 하며 “내가 이 마을에서 50년 동안 살았는데 모르니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뒷산에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으로 만든 큰 산이 능처럼 보였다. 그것이 능이라면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 지세여서 명당 중에 명당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1968년 홍위병들이 부수지 못하고 잘 보존 되고 있구나 하고 혼자 생각 해 보았다. 이것이 장수왕의 능일까 아니면 누구의 능일까?

다음으로 大門火龍을 찾아 갔다. 하지만 거기에서 대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九口裕村을 찾아 가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만나 보지 못 했고 구구유촌의 내력과 구구유촌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가로 세로 높이의 한변의 길이가 2내지 5m쯤 되는 바위들이 산과 밭에 널려 있었다.

다음으로 寒河 동쪽에 있는 培塔寺를 찾아갔다. 절은 안보였다. 절을 본 사람도 없다고 한 사람이 말했다. 한 사람이 큰 廟가 있었던 자리를 안다고 하여 한하를 건너 따라가 보았지만 현재는 묘가 없었다. 한하는 강폭이 100m 쯤 돼 보였고 수량도 적었다. 기념으로 한하의 강 모습을 사진 찍었다. 오늘은 허탕이구나 하고 답사를 마치려 했는데 택시 기사가 참와수고 호숫가에 좋은 곳을 안다고 하여 그쪽으로 갔다.

도착하니 참와수고가 끝이 안보일정도로 멀리 볼 수 있는 호숫가이었다. 큰 궁전이 보였고 그 궁전으로 들어가 사오십미터 올라가면 여러 궁전들이 있다. 여기서 칠팔십미터 더 높이 올라 가면 玉皇閣이 홀로 서있다. 옥황각에서 참와수고를 바라보니 망망대해 같은 호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옥황각이 호수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 여기가 고려 임금들이 서경에 오면 음악을 들으면서 술 한 잔 하며 피곤함을 달래었던 靈豊樓 부계(浮堦)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廟岭과 山環은 답사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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