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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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국제뉴스국 국장
입력 2018-01-2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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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김성곤 전 민주당 의원이 최근 이런 아이디어를 SNS에 올렸다. 남북선수단이 평창올림픽에 공동 입장할 때 한반도기와 태극기, 그리고 인공기까지 나란히 다 들자는 것이다. 한반도기만 드는 데 대해 찬반양론이 팽팽하고(찬 41%·반 49%, 18일 리얼미터) 이로 인한 남남갈등도 심각하니 이렇게라도 해법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4선에 국회 국방위원장을 지낸 김 의원은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국기를 존중해주는 셈이 되니 그게 곧 평화 올림픽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필자는 공감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실현 여부를 떠나 ‘평창’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려 보려는 ‘최초의 절충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실로 이상한 일이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힌 이래 한 달이 다 되도록 우리는 싸우고만 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에선 “올림픽을 평양에 상납했다”고 몰아붙이고, 여당과 진보진영에선 “남북관계 개선에 전기(轉機)를 마련해 보려는 평화올림픽을 헐뜯기만 한다”고 맞받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선 ‘평화올림픽’ 지지자들과 이른바 ‘평양올림픽’을 주장하는 사람들 간에 전쟁이 붙었다. ‘평창’은 사라졌다.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은 세대 간 갈등으로 비화되는 조짐마저 보인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싸움을 말리려 들지 않는다.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을 비롯한 국정현안의 해결을 위해 여야 원내대표 간 청와대 회동을 주선하라고 지시한 게 전부다. 문 대통령은 “과거엔 국가적 행사 때 여야가 보통 원만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듯해 안타깝다”고 했다.

정상적인 국가나 사회라면 이러지는 않을 터이다. 정부든 시민사회든 누군가는 나서서 양측의 입장을 중재·조정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을 최소화했을 것이다. 평창올림픽 논쟁 과정에서 진실로 걱정되는 건 이런 사회적 메커니즘의 부재(不在)다.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만 있고 말리는 사람은 없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치른 올림픽이 끝났을 때 우리는 다시 화해하면 그만일까.

복기해 보면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애초 정부 여당이 그렇게 밀어붙일 사안은 아니었다. 김정은이 돌연 참가 의사를 밝혔을 때 좀 더 신중히 판단하고 대응했어야 했다. 북한의 참가를 막거나 그 속셈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참가는 좋은 일이다. 환영하되 부수적인 실무협의 과정에서 더 꼼꼼했어야 했다.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디테일에서 북한에 휘둘리거나 끌려가는 일이 없어야 했다.

예컨대 북측의 요구 중에서 마식령 스키장에서의 공동훈련이나 금강산 문화제 같은 제안은 사양했어도 됐다. 예상대로 북한은 마식령에 평창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미국의 NBC 취재진을 미리 불러들여 체제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북측의 응원단, 예술공연단, 태권도 시범단 파견도 한두 가지는 거절했어야 옳다. 셋을 다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스하키도 그렇다.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단일팀을 만들자는 건 억지다. 원한다면 앞으로 다른 국제대회에서도 얼마든지 단일팀을 구성할 수 있다. 협의과정에서 북측을 설득하기가 물론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국가의 품격과 우리 선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아쉽기로는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 쪽도 마찬가지다. 사사건건 정권을 공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림픽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는 또 실패했다고 비난할 건가. “올림픽을 평양에 상납했다”는 식의 발언도 자제해야 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자. 한국당이 집권당이 돼 평창올림픽을 치러야 할 상황에 있다면 그런 말을 듣고도 참겠는가. 평창올림픽의 의의와 본질을 훼손하는 비난은 삼가야 한다. ‘평양 프레임’으로 내심 한 건 했다고 흐뭇해할지 모르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그래야 평창올림픽은 물론 다른 이슈에서도 이긴다.

이처럼 양측이 조금씩만 양보한다면 그토록 증오하고 그토록 격렬하게 싸울 이유가 없다. 보수, 진보 모두 평창올림픽이 성공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지구촌의 축제를 품에 안고 기뻐하고 감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북한의 돌연한 참가의사 표명에 대해서는 보혁(保革)을 막론하고 그 속셈을 꿰뚫고 있다. 이 정권인들 모를까. 올림픽 성화(聖火)가 꺼지면 다시 북핵(北核)과의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도 다 안다. 그런데 대체 왜 싸우는가? 여야의 관성(慣性) 탓이라면 그 정도야 충분히 말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누구라도 이런 말로 상대를 진정성 있게 설득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급작스러워 많이 놀라셨겠지만 남북대화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몇 가지 사업을 해보려 한다. 투명하게 추진하겠으니 도와주기 바란다.” 이래도 ‘평양올림픽’이란 말이 나왔을까.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나서기는커녕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싸움을 부추기기에 바쁘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직접 나섰을까.

‘구경 중에 싸움구경만 한 게 없다’고들 해서인지 모두들 쳐다보고만 있다. 한때는 언론이 중심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요즘엔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엔 우리 사회의 원로들이 기꺼이 향도(向導)를 자처했지만 이념논쟁과 댓글에 질려서인지 흔한 성명서 하나 내는 걸 못 봤다. 사회에 어른이 없으니 싸움닭 같은 여야 정치인들의 치기어린 설전(舌戰)만 난무한다.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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