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61] 명황제(明皇帝)는 왜 포로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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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0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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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틀어진 명나라와의 관계
東西 몽골이 패권을 다투는 동안 명나라는 西몽골 편이었다. 하지만 동서몽골이 한 세력이 됐을 때 명나라와의 연대 관계는 미묘해졌다. 적대적인 자세는 명나라 쪽에서 먼저 취했다. 영락제의 몽골 원정 후 명나라는 몽골에 대한 회유책으로 조공 형식을 빌린 무역을 허용했다.

[사진 = 몽골 초원의 말무리]

그래서 국경지역에 마시(馬市)를 열고 몽골말을 대거 사들였다. 그것이 오이라트의 주 수입원이었다. 이 마시에서 명나라가 말 값을 시가 보다 더 비싸게 사주는 것이 외교 관례였다. 이를 통해 몽골주민들은 생존을 보장받고 양국의 긴장 관계를 해소할 수 있었다.

몽골측은 말의 숫자와 수행원의 숫자를 부풀려 돈을 더 받아냈는데 이는 명나라로서는 큰 경제적 손실이었다. 몽골에서는 3천명이 넘는 수행원을 데리고 오면서 황제의 하사품까지 받아갔다.

여기서 명나라는 국가 예산이 빠져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수행원 숫자를 제한하고 말 값도 5분의 1로 깎아서 지불했다. 명나라가 말 값을 사정없이 후려친 데다 수행원의 숫자까지 크게 제한하면서 수입이 크게 줄어들자 몽골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공격에 나선 에센

[사진 = 왕진 추정도]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은 크게 노했다. 에센은 이는 분명한 명나라의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즉각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말 값을 후려치고 수행원 수를 제한하는 조치를 주도하며 호전적인 조치를 고집한 사람은 바로 당시 명나라의 실권자였던 환관 출신 왕진(王振)이었다.

▶환관 왕진의 전횡
명나라는 초기부터 황제 독재체제가 완비되면서 황제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환관이 득세했다. 이들은 동창(東廠)이라는 특수 정보기관을 운영하면서 모든 고관은 물론 일반인까지 감시하고 처벌하는 전횡을 부렸다.
 

[사진 = 정통제]

이 동창은 금의위와 함께 무협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관이다. 외국무역을 담당하는 시박사(市舶司)까지도 이들의 차지였다. 특히 당시 황제였던 정통제(正統帝) 영종(英宗)의 스승이었던 환관 왕진이 지닌 권한은 황제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다.

원래 왕진은 과거에 낙방하자 스스로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된 인물이었다. 당시 환관 중 글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어서 태자의 시중을 들며 글공부를 가르치도록 명받았다. 그는 언변이 유창하고 태자의 비위를 잘 맞춰서 태자가 9살 때 정통제로 즉위하자 조정의 실세가 된 것이다.

이후 왕진은 각종 청탁 비리로 재산을 축적하며 전횡을 부렸다. 금과 은을 채운 왕진의 창고가 60동이 넘은 것으로 기록돼 있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만하다. 부정 축재에 눈이 먼 왕진은 국가의 돈이 몽골 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둘 수 없다며 외교문제까지 손을 대면서 오이라트와의 대결을 자초했다.

▶몽골 對敵위해 정통제 친정
영락제가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가급적 몽골과의 대결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왕진은 자신의 조치에 화가 난 오이라트가 공격해온 것을 알고 더욱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상대방의 반발을 촉발시켰다.

그래서 황제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자고 윽박질렀다. 당시 병부시랑(兵部侍郎:국방부차관)이었던 우겸(宇謙)을 비롯해 대부분의 장수들과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조치가 분쟁을 불러왔다는 것을 아는 왕진은 자신의 책임회피를 위해서 강경입장을 주장하고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왕진은 결국 황제를 앞세워 50만 대군과 함께 몽골연합군에 대적하기 위해 북경을 떠났다. 엄청난 수의 명나라군대는 당장 오이라트 군대를 궤멸시킬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말이 50만 대군이지 실제로는 그 수가 훨씬 적어 정확히 얼마의 병력인지 알 수가 없었다.

50만 명은 장부에만 존재하는 수였지 실제 병력이 장부의 10%도 안 되는 곳이 허다했다. 문관을 비롯한 비전투 인원이 상당수 들어있는 허수의 군대였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 군대는 농민을 징집한 군대라 몽골 기병과 싸울 수 있는 전투력도 전술도 없었다.

이때가 1449년으로 조선으로 치자면 세종 31년에 해당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 네 갈래로 나눠진 동서 몽골연합군은 국경을 넘어 명나라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초토화된 대동, 명군 철수 결정
에센의 주력군은 산서(山西)의 대동(大同)을 공격했다. 대동은 과거 평성(平城)으로 불렀던 곳으로 흉노의 묵특선우와 한 고조 유방이 한판 대결을 펼쳤던 곳이다. 바로 근처 백등산에서 포위당한 유방이 수모를 겪었던 그 곳이다.
 

[사진 = 명군의 화전발사기]

그 대동은 이번에도 흉노의 후예 유목민에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자금성을 떠나 북서쪽으로 380여 Km를 이동해 대동에 도착했던 정통제와 왕진은 쑥밭이 돼 버린 참화의 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발대가 궤멸에 가까운 패전을 한 것이었다. 몽골군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인 왕진은 황제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23살의 젊고 무분별한 황제는 왕진의 권유에 따라 호기롭게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겁을 먹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내 북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토목보(土木堡)의 변(變)’ 발생
그런데 왕진은 여기서 또 한 번 농간을 부린다. 처음에 왕진은 자신의 고향인 울주(蔚州:하북성 울현 )을 지나치면서 자신의 금의환향을 과시하려 했다. 그리고 그 길이 가장 빠른 철수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때가 가을 추수철이라 엄청난 대군이 자신의 고향을 통과하게 되면 추수에 방해될 뿐 아니라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대의 철수 방향을 바꿔버렸다. 그래서 오이라트군대가 가까이 있는 먼 북쪽으로 돌아서 철수하는 길을 선택했다.

왕진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했지만 그 선택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먼 길을 돌아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철수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 만대의 우마차를 대동한 대군의 이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사진 = 토목보]

이 사실을 알아챈 에센의 기병부대는 곧바로 추적에 나서 선부(宣府)라는 곳에서 명나라 군대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오이라트군의 공격으로 이곳에서 숨진 명군은 4만여 명, 황제 일행은 근처 토목보(土木堡)라는 곳으로 달아났다.

바로 하북성 희래현 근처 지역이다. 대신들은 높은 성곽이 있고 물자가 풍부한 근처 회래성(懷來城)으로 들어가서 숙영하자고 했지만 왕진은 자신의 재산을 이끌던 수천대의 수레가 들어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 토목보에서의 숙영을 주장했다.

토목보는 흙으로 만든 성으로 주변에 장애물이 없고 사막지형이어서 주변에 물도 없었다. 오이라트 軍으로서는 더 없이 공격이 쉬운 곳이었다. 결국 명나라 군대는 이곳에서 포위돼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사실상 전멸했다.
 

[사진 = 토목보의 변 진행도]

왕진은 평소에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던 호국대장군 번충(樊忠)의 철추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참혹한 전투현장에서 빠져나가려 했던 정통제는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을 명사(明史)는 ‘토목보의 변’이라고 부른다.

▶포로가 된 황제대신 경태제 즉위
에센은 포로로 잡힌 정통제를 정중하게 대우했다. 에센은 명나라에 정통제의 신병을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송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명나라 쪽에서 사정이 달라져 별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된다. 토목보의 변으로 명나라 조정은 대혼란에 빠졌다.
 

[사진 = 우겸]

남경(南京)으로 천도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바로 북경수비 사령관을 맡았던 병부시랑 우겸(于謙)이었다. 우겸은 “남쪽으로 도망갔던 송나라의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주위를 설득해 수도 천도주장을 잠재우고 결사대를 모아 결사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우겸은 중국 역사에 탁월한 전시내각의 수장으로 기록돼 있다. 우겸은 일단 포로로 잡힌 황제 대신 황제의 동생 주기옥(朱祁鈺)을 새 황제인 경태제(景泰帝)로 등극시켜 비상내각을 수립했다. 왕진의 가족은 모두 체포돼 주살되고 재산이 몰수 됐다.

다른 황제가 등극한 상황에서 포로로 잡은 황제는 별 효용성이 없었다. 명나라 쪽에서 오히려 정통제의 귀국을 환영하지 않았다. 사직(社稷)이중요하지 군왕(君王)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명나라 쪽의 자세였다.

명나라 황제 송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분노한 에센은 다시 대군을 동원해 북경까지 진격해 성을 포위한 채 위협했다. 하지만 대포와 총으로 대응한 명나라 군을 상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피해만 늘어났다.

에센은 하는 수 없이 20여일 만에 정통제를 풀어주고 몽골로 돌아갔다. 풀려난 정통제는 이미 새 황제가 들어서 있는 상황이라 자금성의 남궁에 연금 된 채 상황(上皇)으로 세월을 보냈다.

[사진 = 경태제]

그러다가 경태제가 중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자 장군 석형(石亨)과 조길상(曺吉祥)등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하고 정통제를 복위시켰다. 경태제는 폐위 뒤 병으로 숨졌다.

▶명나라 조선에 출병 요구
‘토목의 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10만 명의 출병을 요구했다. 이는 군사적 도움도 도움이지만 혹시 조선이 몽골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세종은 성삼문(成三問)의 처숙부인 김하(金何)를 사신으로 보내 왜구의 침공 등에 대비해야하기 때문에 파병이 어렵다고 통보했다.

[사진 = 초원의 말무리]

그러자 명은 이듬해인 1450년, 파병을 철회하는 대신 말 2만에서 3만 필을 대신 보내라는 요구해와 결국 조선은 말 5천 필을 명나라에 건네주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몽골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의 불티가 조선까지 튀었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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