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규제혁신 토론회'에 참석했던 대기업 전략담당 임원들을 만났다.
토론회의 시사점과 그룹에 미치는 영향과 대책 등을 회장에 바로 보고했다는 한 참석자는 필자에게 "이 정부 들어서 기업의 얘기를 들어준 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는 “신산업·신기술은 일단 돕는다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놀랐다고 했다. 그는 기업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기 때문이라며, 정부의 달라진 모습에 의아했다고 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사실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의 3대 경제정책 중 소득주도 성장과 공정경제에는 이렇다 할 게 없어 혁신성장으로 올해 전략 방향을 잡고 준비를 했다"며 "신사업 발굴에 사활을 걸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기업들이 약속이나 한 듯 연구·개발(R&D)을 통한 딥체인지, 혁신을 말하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변화하고 도전해야 한다’, ‘익숙했던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려 사업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기존의 껍질을 깨는 파격적 수준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 딥체인지의 핵심’이라며 신사업만이 기업의 장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규제 혁신은 혁신 성장을 위한 토대”라며 “새로운 융합 기술과 신산업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는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고 했다. 이전 대통령들의 발언에 비해서는 순화된 표현이다.
첫 규제개혁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설치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규제 전봇대를 뽑겠다”고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규제를 두고 ‘손톱 밑의 가시’, ‘암 덩어리’라고도 했다. 이전 정부가 극악한 표현까지 써가며 혁파에 나섰으나 근치(根治)되지 않고 ‘암 덩어리’는 더 커졌다.
정부는 이번에 ‘새 정부 규제개혁 추진방향’을 발표하면서 100건이 넘는 규제 해소대책을 내놨다. 당장 풀어야 할 과제를 38개로 정했고, 27건은 3월까지 입법을 완료하겠다고 발표했다.
문 대통령이 “신제품과 신기술은 시장 출시를 우선 허용하고, 필요 시 사후 규제하는 방식으로 규제 체계를 전면적으로 전환해보자”고 발언한 데 대해 기업의 임원들은 대통령의 규제 혁파 의지를 읽었고 기대감을 표명하고 있다.
정부가 혁신성장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눈앞의 과제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개혁 방안이 기업이 진출하려는 거의 모든 신사업·신기술 분야에 걸쳐 있다 보니 산업 규제를 다룬 수백건의 관련 법규가 모두 개정되어야 한다. 여러 부처와 얽힌 이해관계, 부처 간 칸막이와 이기주의 또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당연히 있을 기존 이익집단들의 반발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기업 임원들은 20년 넘게 단골메뉴로 등장한 규제 개혁이 매번 생색내기에 그쳤다며 “이번에는 꼭 돼야 한다. 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라고 호소했다.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도 규제가 혁파의 대상으로 계속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정권은 유한하나 규제의 생명력은 무한하다. 규제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그간의 대책은 도끼나 낫으로 가지치기나 밑동만 잘라내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뿌리는 더 깊고 더 넓게 퍼져 살아남았다.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던 과감한 방식, 그야말로 혁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기업이나 시장이 기대를 거는 이유는 ‘혁명’이란 표현에 있다. 혁명(革命)은 목숨을 끊는다는 뜻이다. 규제 생명의 원천인 뿌리까지 파내겠다는 뜻으로 시장은 이해하고 있다. 우리말에 ‘가죽’은 하나지만, 한자는 가죽을 피(皮)와 혁(革)으로 구분한다. 동물의 가죽을 ‘피’라 하고 털을 뽑고 기름이나 살을 제거하는 등의 무두질을 거친 것은 ‘혁’이라 부른다.
규제의 뿌리를 파내 혁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거기에 쓰일 연장도 호미나 삽, 곡괭이 등 뿌리에 따라 달리 써야 하니 규제 숫자만큼이나 여러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구를 쓰지 않고 뿌리로 들어가는 자양분을 끊어 고사시키는 더 쉬운 방법도 있다. 목숨을 끊을 때 필연적으로 튀어나올 피를 보지 않아도 되고 비명을 듣지 않아도 된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이 정부의 소통력은 큰 자산이다. 그런 정부의 의지와 진정성을 이해당사자들이 충분히 공감하면 규제 스스로 곡기를 끊을 수도 있다. 그간 정부의 노력으로 이해집단들은 규제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속 얘기를 못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회처럼 그 공감의 수단은 소통이어야 한다. 소통은 힘을 가진 쪽이 안에서 여는 게 자연스럽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 두부 사온다’는 말도 있다. 규제 혁신에도 상대가 고마움마저 느낄 ‘큰 소통’이 절실하다.
필자: 조성권 초빙논설위원 ·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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