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도시 중동에 산다. ‘부천 중동’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경기도의 서울 위성도시에 산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고 싶지 않아서다. 함박눈이 펄펄 내렸던 2월 어느 날,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한참 눈을 감상했다. 하염없이 눈을 쳐다보자니 마음이 아늑해지며 시심(詩心)이 솟구쳤다.
‘한밤중 중동에 눈이 나린다. 멀리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의 마음이 떨린다. 눈은 바닥을 육박하고 내 마음은 하늘로 육박한다. 거기 닿으면 고향이 있을 건가.’
시 같은 넋두리를 고향친구들이 모여 있는 카톡방에 올렸다. 다음 날 오전 멀리 고향에 사는 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일상적인 전화겠지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런데 웬걸, 누이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돼 있었다. “자네 무슨 일인가? 사업이 뭐가 어떻게 됐길래 갑자기 사우디로 도망쳤는가? 엊그제만 해도 잘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사우디로 도망이라니, 무슨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여?” “자네가 지금 중동에 있는데 거기도 눈이 내린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며” 나는 사태를 알아차렸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야 했다.
누이에게 ‘보기가 사업이 어렵다더니 사우디 건설회사에 노무자로 취직한 모양’이란 엉뚱한 말을 전했던 친구는 과거에도 비슷한 전력이 있는 친구였다.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이 친구가 누이에게 “보기 그 자식은 엊그제 규만이랑 술 먹고 집에 들어가다 지갑이랑 휴대폰을 몽땅 잃어버렸답디다”는 말을 전함으로써 누이로부터 일장훈시를 듣게 만든 친구였다.
그런 일이 있기야 했지만, 생각하자니 친구에 대한 배려라고는 '1'도 없는, 참 나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경제신문에 그래그래 글을 잘 써서 아주 유명해졌다’든가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했는데 해달라 해달라 해서 도서관장이 됐다더라’는 그런 좋은 말은 쏙 빼고 부정적인 면모만 냉큼 전달하는 것이 괘씸했다. ‘이 자식은 평소 내가 잘못되기만 바라는구나’ 싶었다. ‘내 너를 더 이상 친구로 생각지 않으련다’며 그 녀석 휴대폰 번호를 삭제해 버렸다.
일본 도쿄의 헌책방 거리 빌딩 지하에 12평 남짓한 ‘미래식당’이 있다. 근처 직장인들에게 점심을 파는, 우리로 치면 작은 백반집이다. 이 식당 35살 여주인 고바야시 세카이는 매월 매출을 홈페이지에 공개하는데 그 수치가 놀랍다. 작은 식당이 홈페이지까지 있다는 것이 어째 예사롭지가 않긴 하다. 이 식당의 남다른 점은 두 가지, ‘한끼알바’와 ‘무료식권’이다. 근처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이 식당에서 50분 동안 설거지나 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
대가는 900엔짜리 미래식당 한 끼 식권. 식권을 받은 이는 자신이 그걸 쓸 수도 있고, 식당 앞에 붙여놓을 수도 있다. 식당 앞에 붙어 있는 식권은 한 끼 점심을 돈 없이 해결하려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이 무료식권은 단지 900엔의 기부가 아니라 50분의 노동으로 누군가의 끼니를 도와준다는 배려가 담겨 있다. 식권으로 밥을 먹은 사람은 ‘900엔의 도움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위해 50분 동안 식당에서 수고로운 일을 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대가로 지불한다. 미래식당이 파는 것은 ‘밥’이 아니라 ‘배려’다. 그래서 작은 규모에도 매출실적이 남다른 것이다('당신의 보통에 맞추어 드립니다' 도서 참조).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들어갈 때였다. 서너 걸음 앞서 가던 젊은 청년이 유리 출입문을 열고 통로로 들어간 후 문을 그대로 놔 버리지 않고 내가 문에 가까이 갈 때까지 문을 붙잡고 기다려 주었다.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쉬운 일이지만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그 청년에게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내가 사장이라면 저리 배려심 깊은 청년을 채용할 텐데’란 생각까지 들면서 출근길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각박한 서울의 누군가가 ‘미래식당’을 해본다면 좋겠다. ‘한끼알바’를 신청하고, 받은 식권을 문 앞에 붙여둠으로써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노동의 대가로 한 끼니의 배를 채우게 하는 1번 주인공이 되고 싶다. 지하철 칸마다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 지정해 놓은 ‘임산부 배려석’에는 오늘도 어린 처자와 중년의 아재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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