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첫날. 기록적인 한파는 끝났지만 여전히 바람은 찼다. 1일 오후 2시 서울 기온은 0도. 이 날씨에 생일 파티를 하러 실외로 나온 사람들이 있다. 다만 주인공은 불참했다. 1952년 2월 2일생인 박 전 대통령은 67번째 생일을 옥중에서 맞을 예정이다.
이날의 생일 파티는 극우 성향의 인터넷 언론 미디어워치가 주최했다. 15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대부분 중장년층 여성이었다. 간혹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주최 측에서 나눠준 빨간 '망토'와 오렌지색 비니를 쓰고 있었다. 흰색 면장갑을 낀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은 북한을 폭격할 권리가 있다"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망토와 비니를 나눠주던 주최 측 관계자는 "행사 기획자들이 색깔을 정했다"면서 "빨간색은 박 전 대통령이 예전부터 좋아하셨고, 정열과 부활의 의미라고 하더라. 오렌지색은 타오르는 모습이라고 하던데"라며 의미를 설명했다. 빨간색과 오렌지색의 조합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자는 "비니는 참석자들에게 선물로 지급하지만, 망토는 다음 행사 때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회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의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가 들려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 참석 인원은 계단 맞은편에 자리 잡은 노점상에서 샀다. 노점상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태극기와 성조기는 물론,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 또한 판매했다. 성조기는 5000원, 태극기는 3000원이었다.
'애국당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상인은 가판대에 놓인 상품들은 “동생 공장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애국당 조원들이 헌금을 좀 내고 여기서 판매 한다"는 그에게 물건이 잘 팔리는지 물었다. 그는 "많이 팔린다"고 답했지만, 이날 가판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는 "변희재 씨보다 조원진(대한애국당 대표) 씨가 주최할 때 모이는 사람이 더 많다"고 말했다.
파티는 국민의례로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이 반복 재생되던 스크린이 거대한 태극기로 변신했다. 계단 앞 연단에서는 한 밴드가 록 버전으로 편곡한 애국가를 연주했다. 거대한 앰프에서 흘러나온 전자기타의 날카로운 소리가 참석자들의 노랫소리를 압도했다.
생일파티답게 생일 축하 노래도 빠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일어났다. 현장을 촬영 중이던 채널 A 취재진이 정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놓친 것이다. 채널 A의 요청을 받은 사회자는 참석자들에게 "한 번 더 노래를 부르자"고 다독였다. "YTN이든, KBS든 또 불러달라고 요청하면 또 불러주자. JTBC가 요청한다고 해도 또 불러주자!"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장에서 목격된 방송사는 채널A 뿐이었다.
태극기로 쓰이던 스크린은 이제 박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사진을 슬라이드쇼로 보여줬다. 팬클럽이 개최하는 여느 연예인 생일파티 못지않았다. 이후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 등 주최 관련 단체 인사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침조회 때 교장 선생님의 훈화처럼, 발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회 분위기 또한 느슨해졌다.
유튜브 방송을 통해 행사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한 노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목숨 걸고 지지한다"면서 "돈 한 푼 받은 것도 없는데 순전히 언론과 야당들이 공모해서 엮은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는 남의 생일파티에 성조기를 들고 온 이유에 대해 "미국이 버텨주지 않으면 빨갱이 세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뒷줄 너머에 서성거리는 남자 고등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는 "엄마를 따라 나왔다. 2학년인데, 공부하느라 관심이 별로 없다"면서도 "보수가 진보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진보 단체들은…"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인터뷰 잘해라"며 스쳐지나가는 엄마를 향해, 아들은 "보수가 더 좋다고 그랬어"라고 득의양양하게 외쳤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자 자리를 이탈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시간 이상 실외에 가만히 앉아 있기는 어려운 기온이다. 이들 중 일부는 양지에서 햇볕을 쬐며 몸을 녹였다. 휴지로 연신 콧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학생 딸과 함께 나온 주부도 있었다. 그는 "태극기 집회에도 나갔다"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딸도 자진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아침부터 함께 밖에 있었다는 두 사람의 손은 추위에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자유밴드'가 무대 위에 오르자 다시 집회가 달아올랐다. 빨간색 하이힐을 신은 여성 보컬은 첫 곡으로 드라마 '명성황후' OST인 '나 가거든'을 열창했다. 일순간 을미사변이 일어난 19세기 말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이어진 뜨거운 박수갈채와 환호 소리는 이들이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심정과 시각을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라고 할 만했다.
생일파티의 클라이맥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선물 공개다. 자신을 "구국 전사들 대장"이라고 소개한 유해빈 씨가 연단으로 올라왔다. 모피 코트를 입고 털모자를 쓴 유씨는 사비를 들여 준비했다며 직접 제작한 남색 코트와 목도리, 그리고 5개의 브로치를 보여줬다. 코트와 목도리에는 영문 성경 구절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제작 비용을 묻자 유씨는 "안돼. 대통령님 입으시는 건데"라며 웃었다. 유씨는 "내일(2일) 구치소를 찾아가서 박 전 대통령에게 선물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사랑으로'를 함께 부르고 생일파티는 오후 4시쯤 마무리됐다. 이들은 "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청와대에 가까이 가겠다"며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추위 때문일까. 사회자가 행진을 독려하는 중에도 참석 인원 중 일부는 서둘러 망토와 모자를 내려놓고 무리를 벗어났다.
길을 가는 시민들에게 이날 파티에 관해 물었다. 고개만 돌릴 뿐 발걸음을 멈추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욕을 내뱉기도 했다.
파티장 앞을 지나던 50대 주부는 "나도 예전에는 태극기를 흔들었다"며 "시국이 어느 때 인데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체 현장견학으로 친구들과 광화문을 찾았다는 고등학생 또한 "되게 별로다"면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시민들의 반응은 날씨보다 더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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