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강우규 의사]
강우규 의거 = 1919년 9월2일. 65세의 강우규(1855~1920)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대문역(구 서울역)에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제3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 그 속에 강우규가 있었다. 사이토총독 부부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그가 폭탄을 던졌으나 빗나갔다. 총독은 의복이 조금 탔을 뿐이었고, 동행한 경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미국 뉴욕 시장의 딸인 해리슨 부인 등 약 30명이 부상했다. 일본인 기자 2명이 즉사하였다. 재거사를 위해 도피한 강우규는 9월 17일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됐다. 1920년 4월 25일 사형 언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그는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음이 부끄럽다.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만 충격이나마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될 때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봄바람만 부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느낌이 없으리오" 라고 시를 읊었다.

[사진 = 송학선 의사 순국 추모제.]
송학선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금호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눈여겨 봐두었다.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라 판단했다. 26일, 27일 양일간 칼을 품고 사이토를 기다렸다. 사흘째인 4월 28일 창덕궁에서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세 명이 탄 무개차가 있었다. 저 놈들이 사이토 일행이구나. 천천히 다가오는 차에 뛰어올라 품속에 있던 칼을 꺼내 휘둘렀다.
순식간에 탑승자 세 사람을 죽였는데, 경성부회 평의원 다카야마, 사토, 이케다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사이토처럼 보이는 고관(총독이 아니었지만, 당시 그는 알 수 없었다)을 향해 달려들어 가슴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일을 끝낸 뒤 달아나다가 뒤쫓아오던 조선인 순사 오환필을 찔렀다. 다시 도주. 휘문고등보통학교 인근에서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이다 붙잡혔다. 송학선은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192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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